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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핵전쟁 위기와 극적인 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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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과 미국이 국가의 공식 성명을 통해 최고수위의 말을 주고받으며 언어적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모두 예측불허의 인물들이어서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의 글은 단지 말싸움이 아니라 정말로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촉즉발 대치상황이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입니다.

 

 

1895년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섬에서 일어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은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그 전쟁에서 수개월 만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파리 조약에 따라 푸에르토리코, 괌 그리고 필리핀이 미국의 영토에 포함되었고, 쿠바는 독립했지만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와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에 의한 오랜 경제적 착취는 쿠바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959년 체 게바라의 도움을 받은 피델 카스트로가 일으킨 반란이 성공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등 일련의 정책조치로써 미국과 갈등을 빚었고, 미국은 플로리다 해안에서 10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산당의 교두보로 자리 잡은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1961년 4월 CIA가 훈련한 1200명의 쿠바 난민 특공대들이 피그스 만(the Bay of Pigs)에 상륙하여 카스트로 정권을 침공했으나 모두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실패로 끝난 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쿠바는 소련에 접근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1962년부터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미국이 머지않아 또 다른 공격을 감행할 것을 대비해 동맹국 쿠바에 최신무기를 공급했습니다. 1961년에 소련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주를 막기 위해 베를린을 동과 서로 가르는 장벽을 쌓았고 그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베를린의 경계선에서 일촉즉발의 충돌위기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1961년 미국에서는 소련의 베를린 장벽 쌓기, 피그만 공습 실패, 소련의 유리 가가린의 최초 우주비행 등 케네디의 리더십이 상처를 받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습니다. 1962년 봄과 여름, 소련으로부터  쿠바로의 무기 공급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쿠바문제는 미국 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1962년 11월에는 하원의원 전부 그리고 상원의원과 주지사의 삼분의 일을 선출하는 중간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해 5월에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공급하기로 결정했고 8월부터 쿠바에 반입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야당인 공화당은 쿠바가 미국을 위협하는 소련의 전초기지가 되고 있으며, 그것이 민주당 케네디 행정부의 한심한 외교정책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그것을 핵심 선거쟁점으로 삼았습니다.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데 더 이상 야당의 정치공세에 시달리고 없다고 생각한 케네디 대통령과 민주당 정부는 소련의 그와 같은 행동에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미국이 결코 쿠바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쿠바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고 했다고 술회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쿠바를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고 미국이 소련을 겨냥하여 설치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대응책으로 ‘힘의 균형’ 차원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흐루쇼프의 전략은 미국의 공격적인 쿠바 탄압과 유럽에서의 핵전략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지만 당시 케네디와 그의 참모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9월 11일 특별성명을 발표하면서 아직 쿠바에는 공격용 핵무기가 반입되지 않았고, 소련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의 말과 달리 9월에는 쿠바의 핵미사일 기지가 이미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었습니다. 10월 15일 미국의 U-2 고공정찰기가 쿠바상공을 비행하면서 촬영한 사진에서 사정거리 1000마일의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및 사정거리가 2000마일인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과 그 기지가 확인되면서 국면은 큰 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U-2 정찰기의 촬영이 케네디에게 보고된 10월 16일부터 소련이 철수의사를 밝힌 10월 28일까지 13일간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첨예하고 위험한 대치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핵전쟁의 위험까지 고려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대치상황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이미 소련은 핵무기가 장착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여 미국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추가로 배치한다고 해서 미국에서 군사적 위협이 크게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국내외의 정치적 파장이 컸고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적으로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참패할 것이 분명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9월 11일 성명에서 쿠바에 공격용 무기가 없다고 확언한 것이 거짓말로 드러남으로 인해 탄핵을 받게 될 상황으로 흐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와 그의 참모들은 쿠바에 건설 중에 있고 조만간 실전사용이 가능하게 될 핵미사일을 어떻게든 제거해야 했습니다.

 

10월 18일과 이튿날 케네디의 주재로 열린 수차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그의 군사참모들은 하나같이 케네디에게 선제공격을 명령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그 선제공격 방법은 미사일 기지에 정교하게 공중 폭격을 하는 족집게 공습(surgical airstrike)일 수도 있고, 육해공군을 망라한 전면침공으로 지상군이 미사일 기지 제거를 마무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방법 모두 미사일 기지에 있는 다수의 소련군을 살상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해 소련이 보복행동을 하면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의 참모들의 강경한 요청에도 케네디 대통령은 선제공격은 결국 궁극적인 실패(a final failure)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참모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10월 18일 오전 11시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이제 문제는 상호간 핵무기를 동원한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인가 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해상봉쇄와 같은 낮은 수준의 군사행동과 외교적 타결방안의 모색에 주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공군참모총장 리메이 대장은 케네디의 해상봉쇄와 외교적 해결책 모색을 1939년 영국이 히틀러에게 했던 유화정책에 비유하면서 당시 영국의 근시안적 무지함과 비겁함을 케네디가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불만을 그 앞에서 토로했습니다. 육군, 해군의 참모총장들도 쿠바를 폭격하는 등 침공을 단행할 신속한 국사조치를 촉구했습니다. 군 수뇌부들은 속으로 케네디가 자신들의 통수권자라기보다는 비겁하고 멍청한 철부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군 수뇌부들은 그 당시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는 양과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소련의 핵무기에 열배 이상이라는 것에 주목했지만, 소련 핵무기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미국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무신경했습니다. 케네디는 회의를 마친 후 자신의 보좌관인 파워즈에게 “만일 우리가 장군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다면 우리들 중에 아무도 그들에게 틀렸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라고 말하면서 장군들이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에 질려했습니다. 케네디는 1차 대전 같은 대재앙이 단순히 국가들의 섣부른 경고와 대응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10월 20일 케네디의 명령으로 봉쇄작전을 위해 3백 척의 해군 함정들이 카리브 해역 인근에 배치되었습니다. 만일의 경우 쿠바침공을 위해 18만의 병력도 대비시켜놓고 있었고, 미사일 부대도 명령이 하달되는 즉시 몇 분 안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핵 방공호로 비상식량과 식수 그리고 의약품들을 보낼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관측했다는 것과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해상봉쇄를 명령했다는 내용의 연설문을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보냈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핵전쟁으로 비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자초해서는 안 돼지만 막다른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과감히 맞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케네디의 연설에 뒤이어 흐루쇼프와 소련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왔습니다. 흐루쇼프는 쿠바로 가는 모든 선박들에게 진로를 바꾸지 말고 계속해서 항해하라고 지시했고, 대륙간 탄도미사일 부대에게 비상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미국의 쿠바 해역에 대한 봉쇄행위는 공해상에서 항해권을 부인하는 것으로 소련과 쿠바에 대한 명백한 침략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몇 차례 개인 서신을 교환했으나,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비공식적인 의사소통 채널이 없었습니다.


미사일 기지 건설을 위한 장비를 실은 소련선박이 흐루쇼프의 명령대로 쿠바에 접근하면 미 해군이 공격 및 나포를 시도하여 양국 사이에 핵전쟁까지도 전개될 수 있는, 그야말로 치킨게임으로 상황은 치달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의 친동생이면서 법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가장 긴박했던 13일 동안을 회고록의 형태로 발간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10월 24일에 소련 잠수함을 뒤따르던 두 척의 소련 선박이 미국의 봉쇄라인으로부터 회항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헬기로부터 폭탄으로 소련의 잠수함을 공격할 것이라는 보고가 날아들었고 대통령의 상황 통제권은 상실될 수밖에 없는 국면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을 “그는 손을 올려 입을 감싸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고 눈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쩌면 미국과 세계의 운명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 했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미국이 결코 쿠바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쿠바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고 했다고 술회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쿠바를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고 미국이 소련을 겨냥하여 설치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대응책으로 ‘힘의 균형’ 차원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렇듯 전략적 균형에 대한 계산속에서 행동한 흐루쇼프이지만 미사일 배치 당시 미국의 대응 폭에 대한 예견에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것을 결국 소련이 용인하였듯이 미국도 결국에는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용인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사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범한 오류였습니다. 소련과 달리 미국은 민주국가이고 케네디와 민주당 정권은 라이벌 정당인 공화당에게 견제를 받고 있으며 중요한 선거가 바로 코앞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미국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미사일이 있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케네디 정부와 민주당 정치인들이 감당해야 했고 그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쿠바 미사일 기지는 케네디 정부가 목숨을 걸고 제지해야 하는 사안이었고, 그들은 치킨게임에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흐루쇼프와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존 프레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상대를 오판하고 말았습니다.


10월 26일 미국은 정권실세 로버트 케네디가 주미 소련대사 도브리닌을 만나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쿠바로 향하는 두 척의 소련 선박이 미국의 봉쇄라인으로부터 회항하지 않는다면 미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48시간 안에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을 경우 공중폭격에 이은 지상군의 침공으로 미사일을 강제로 제거하겠다고 통보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는 경우 쿠바에 대한 불가침을 명시적으로 약속하고, 터키 주둔 중거리 핵미사일의 철수를 묵시적으로 약속하는 등 상응하는 대가를 제시했습니다. 일단 최후통첩을 던진 이상, 소련이 그 요구에 불응할 경우 케네디 정부는 그 협박을 실행에 옮기든지, 아니면 물러섬으로써 그에 따른 온갖 정치적 비용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도브리닌 대사는 미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흐루쇼프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케네디 정부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흐루쇼프에게 정확히 전달할 것이라고 로버트 케네디는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긴장 속에 일단 공은 흐루쇼프와 소련에게 넘어갔습니다. 흐루쇼프 서기장도 피를 말리는 고민을 했습니다. 실제로 케네디가 흐루쇼프에게 요구한 것은 크게 무리가 없었습니다. 케네디는 소련에게 쿠바와의 동맹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단지 미사일의 철수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대결의 장소는 카리브 해였고 거기서는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누렸기에 미국은 협박이 엄포에 그치지 않도록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케네디 정부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과 군 수뇌부의 기류도 위기의 정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소련 측에 부담감을 조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순응에 대해 쿠바에 대한 불가침과 암묵적인 터키 미사일의 철수 약속이라는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흐루쇼프는 도브리닌 대사로부터 케네디의 요구조건과 함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작은 사건이라도 터지는 경우 젊은 케네디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상실하고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흐루쇼프는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배제하고, 아무도 미사일 근처에 접근시키지 말고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10월 2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흐루쇼프는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설치하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흐루쇼프가 라디오 방송을 택한 이유는 통신기술이 부족했던 그 당시 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었고, 그의 선언은 참모들의 선제공격 요구에 직면해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던 케네디 대통령을 구했습니다. 흐루쇼프의 라디오 방송 선언 이후 쿠바에 있던 미사일과 핵탄두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소련으로 보내졌고, 카스트로는 소련의 굴복에 화를 내며 미사일 철거에 대한 합의안에 서명을 거부하고 UN 감시단들의 검증도 반대하며 저항했습니다. 터키에 배치되었던 주피터 미사일들은 터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완전히 철수되었습니다. 그 대신 미국은 터키를 위해 최신형 폴라리스 미사일이 탑재된 잠수함을 지중해에 배치했습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상황 시에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소통을 위해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전화를 개설했습니다. 전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핵전쟁의 위기는 이렇게 극복되었습니다.

 

 

* 그 후의 이야기


흐루쇼프가 미국에 대해 오판하여 양국의 치킨게임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킨 사건 이후 소련 공산당의 많은 간부들은 그의 무능력한 예지력과 충동적인 정책을 불신했습니다. 1964년 10월 초 흐루쇼프가 피춘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모스크바의 브레즈네프 집무실에서는 정치국 간부들이 모여 흐루쇼프 축출에 필요한 모든 세부 사항들을 논의를 마쳤습니다. 흐루쇼프가 귀국했을 때에는 부하 모두가 등을 돌린 상태였고,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요청한다.'는 성명서를 남기고 공산당 서기장을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습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80년에 이르러 오히려 미국의 핵전력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실각 후 흐루쇼프는 호화로운 별장에서 연금당한 상태로 살아갔고, 감시 상태지만 소련을 방문한 외국 인사들과의 만남은 비교적 자주 있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만년에 그는 회고록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그가 휴대용 녹음기에 녹음을 하고 이를 타이피스트가 글로 옮기는 방식으로 회고록을 작성했습니다. 그의 회고록은 미국에 밀반출되어 1970년 가을에 출간되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일년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텍사스  댈러스에서 퍼레이드에 참석해 영부인 재클린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가던 중 암살범에 저격당했고, 오후 1시에 공식 사망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1시 50분경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오스월드는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이틀 뒤 오스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 의해 암살됐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상을 둘러 싼 음모론 및 갖가지 논란은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오스월드를 암살한 잭 루비는 1967년 감옥에서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암살범의 암살범이 암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후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1964년 11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예비 후보로 출마하여 여러 주에서 승리를 거두고, 1968년 6월 4일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어 민주당 후보 지명이 거의 확실시 되었습니다. 다음날인 6월 5일 LA의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나오던 중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시르한에게 8발의 총격을 받아 다음날 새벽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대선 후보 선두주자가 암살당한 채로 1968년 8월에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습니다.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이후 베트남전 반대의 기치를 내건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선두주자로 나섰으나 린든 존슨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중진들의 조직적 도움을 받은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과반수의 표를 얻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험프리 부통령은 예비후보 경선에 참가하지도 않은 후보였지만 존슨 등의 도움으로 대의원 표를 싹쓸이했습니다. 휴버트 험프리는 그해 12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에게 참패했습니다.


리처드 닉슨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패한 후 1962년에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했지만 극적으로 재기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은 1966년 1박 2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의 정치경력이 끝났다고 판단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후 분기탱천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통령 당선 후 한국에게 집요할 정도로 보복을 가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 다음해인 1969년 그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가 상원의 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 되었고,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해 매사추세츠 채퍼퀴딕섬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뒤 로버트 케네디의 전 여비서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다리에서 바다로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동차에서 혼자 빠져나와 헤엄쳐서 살아난 에드워드 케네디는 사건 발생 10시간 만에 경찰에 신고하였고, 여비서는 익사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른바 '채퍼퀴딕 스캔들'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이후 번번이 대통령이 되려는 에드워드 케네디의 꿈을 좌절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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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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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님의 댓글

no_profile 여기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구안에서 핵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난다해도
한반도에서만이라도
아니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아니면 충청도에서만이라도
아니면 공주에서만이라도
아니 아니 그래도 나야한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나지않게 해주세용.ㅡ.ㅡ
*나무아멘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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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사관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명수사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무아멘타불
놀라운 발상 입니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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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사관님의 댓글

no_profile 명수사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봤습니다
최고 통치자의 고뇌 그리고 한 가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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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늘도 장문에 걸쳐서 좋은글을 올려 주셔서 넘 감사드리며 잘 보고 갑니다,,,
저는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쓸려면 아마도 하루종일 걸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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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암튼 어떠한 경우라도 어떤 식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 아니되옵니다,,,,
만일에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은 본인들이 먼저 파멸이 될것이니 미국이던 북한이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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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수님의 댓글

no_profile 강청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전쟁은 모두의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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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탁님의 댓글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장자량님의 병자호란에 관한 글이나 이번 글 모두가
북한의 핵무기 문제와 연관이 있는 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풀릴 것 같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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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홀드셰이크님의 댓글

no_profile 펜홀드셰이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우기를 각오함으로써 지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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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59님의 댓글

no_profile hok59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일단, 힘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ㅋ ㅠ ㅎ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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