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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적이고 고통스러웠던 1997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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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의 댓글에서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는데, 오늘 글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규모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고 호황기 누리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기까지 재벌들은 앞 다퉈서 금융업에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며 자기 신용만으로 해외 차입이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에 수십 개의 단자사가 종금사로 전환되었습니다. 단자회사는 사금융을 제도금융으로 유치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으로 주요업무는 1년 미만의 어음 및 채무증서 발행, 어음할인, 매매, 어음관리계좌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종금사 등과 경쟁하면서 전성시절을 마감했고, 이에 따라 1991년에 정부는 단자사들을 합병하거나 다른 금융기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에는 우리나라는 30개나 되는 종금사가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국제 신용도가 높아서 해외 금리는 국내 대출금리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수십 개의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로 자금을 차입하여 국내에 대출하는 업무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습니다. 국내에 대출은 단기 뿐 아니라 장기 대출도 흔했습니다.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환율이 크게 오르게 되면 종금사에게는 큰 환차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환율이 오른 이유가 국내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면, 국내 기업에게 장기로 빌려준 돈의 회수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1997년에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1996년에 우리나라에서는 GDP의 4.7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해 12월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OECD 가입은 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선진국들로부터 공식적인 파트너로 인정받게 됨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OECD 가입을 위해서 우리나라는 외환 및 자본 거래의 개방과 자유화를 확대해야 했고 OECD 규정에 맞게 국내 제도를 개편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1996년에 발생한 237억 달러의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는 주로 수출부진에 의한 것이었고, 수출부진의 이유는 당시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원화의 고평가는 자본시장 개방으로 인하여 1994년 이후 해외 자본유입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서울의 아파트촌에 미국인 영어 가정교사가 몰려온 것은 우리 환율이 고평가된 것을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1996년 중에는 기업의 현금흐름이 대단히 악화되었는데, 이는 그 동안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로 인하여 현금유출은 증대되는 반면 원화의 고평가로 수출은 감소되고, 시장개방으로 인한 과당경쟁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등 기업의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의 유입이 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업의 현금흐름 악화로 인한 취약성은 1997년 초반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대기업 연쇄부도를 초래했고, 대기업의 연쇄부도는 대출을 해준 은행과 종금사들을 부실화 시켰고, 은행과 종금사들은 점차로 대외신인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1월 23일 당시 재계 10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의 부도사태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보그룹의 부도는 1996년부터 한국 경제의 운용방식이 종래의 정부주도 방식에서 시장기능 중심으로 전환한 것을 확인한 채권은행들이 한보그룹에 대한 추가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보의 금융권 부채는 총 5조 8천억 원이었는데, 은행권이 챙긴 담보는 2조 7천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제일은행은 자본금인 8200억 원이 넘는 1조 천억 원을 대출한 상태였습니다.

 

한보그룹이 부도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자 대통령 YS는 1997년 3월 5일에 개각을 단행해서 총리에 고건, 부총리겸 재정경제원 장관에 강경식 그리고 재정경제원 차관에 강만수를 임명했습니다. 이들은 통상산업부장관 임창렬, 부총리를 지낸 한국은행장 이경식 그리고 청와대 경제수석 김인호와 더불어 IMF 사태의 주역이 됩니다. 취임 직후 강경식 부총리는 시장기능 회복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는데도 3월 13일에는 재계 서열 17위의 삼미그룹의 부도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금융권에는 8500억 원의 부실채권이 추가로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 1997년에 발생한 대기업 연쇄 부도는 발생 순서대로 진로그룹(19위), 대농그룹(44위), 한신공영(58위), 기아(8위), 쌍방울(55위), 태영정밀(81위), 해태(24위), 뉴코아(27위), 한라그룹(13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대기업들의 연쇄부도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부실화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국내금융기관들의 대외 지급 능력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켰습니다. 거기에 외환 당국의 경직적 환율 관리 등 여러 요인들과 복합되면서 한국에 외환위기를 발생시키게 되었습니다. 대기업들의 연쇄도산은 그 이전 해까지 정부가 시장경제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정경유착이 심화되고, 시장의 비효율성이 누적되어 생긴 부실이 갑자기 시장기능 중심으로 바뀌면서 발생한 불가피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도록 원화의 고평가를 방치한 것과 순전히 자신의 임기 내에 우리나라를 OECD에 가입시키겠다는 YS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실속 없는 자유화와 개방으로 치달은 점은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일부 학자와 전직 관료들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라 사채시장의 거래가 실종된 것이 사채시장에 의존했던 기업의 자금줄을 막아 연쇄부도를 일으켰다고 지금까지도 주장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금융실명제도 IMF 사태를 초래한 하나의 원인입니다.

 

1997년 7월에 태국에서 발생된 외환위기는 동남아시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재계 44위 대농그룹이 적대적 M&A를 무리하게 방어하다 좌초해서 금융권에게 1조 3천억 원의 부실채권을 안겼고, 대형 건설업체인 한신공영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위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은 외환위기가 올 거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네이버를 검색한 결과 태국의 외환위기가 절정에 도달한 시점인 1997년 7월 9 우리나라의 대부분 국책 및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하반기의 경제가 호전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아래 기사 링크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146052

 

이 시점에 한국은행은 달러당 890원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환율방어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1996년 초에 달러당 780원이던 환율은 그해 연말에 840원으로 올랐고 1997년 7월에는 890원을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외환보유고는 7월의 336억 달러를 피크로 외국은행의 자금회수가 가속화되자 하향곡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보와 삼미 등의 연속부도 이후 금융기관의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생겨 해외차입이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와 한국 외환위기의 유사성은 모두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비은행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취약한 부분을 형성하였으며, 외부적 충격에 의하여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파열되어 국제자본의 회수에 따라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취약한 고리가 된 것은 바로 종금사였고, 종금사의 부실문제와 더불어 경제에 있어 약한 고리를 형성한 것은 대외부채의 단기화였습니다. 이는 세계화 추진 및 OECD 가입을 위해 급조된 자본 자유화의 과정에서 미숙한 정책으로 인하여 제도적으로 단기자본의 도입보다 장기자본에 대한 도입에 더 많은 규제가 남아 있게 된 데서 기인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국환 관리규정에 단기외화차입에 대해서는 규제가 없는 반면 장기외화차입에 있어서는 재경부 장관에 대한 사전 신고 의무가 존재함에 따라 종금사들이 규제가 없고 차입금리가 낮은 단기외화 위주로 차입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단자회사에서 전환된 24개 종금사들은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차입하여 수익성 높은 장기대출을 했습니다. 국제금융시장에 겁 없이 뛰어든 전환 종금사들은 단기자금 차입으로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국채를 사고서는 동남아에 외환위기가 들이닥치자 고스란히 떼이고 말았습니다. 1997년 10월 말 기준 종금사들은 단기로 129억 달러, 장기로 71억 달러를 조달하였는데 이 중 단기로 운용한 것은 32억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 167억 달러는 장기로 운용하여 심각한 차입대출의 기간 불일치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24개 전환 종금사들의 자산과 부채 사이 기간 불일치는 외화유동성 부족을 한없이 증폭시키고 환율폭등을 가져오는 엄청난 화를 자초했고, 결국은 모두 퇴출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는 사이에 우리나라에게 두 가지 메가톤급 악재가 새로 닥쳤습니다. 하나는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의 붕괴이고 다른 하나는 동남아의 금융위기가 홍콩까지 번진 것이었습니다. 기아사태와 홍콩 금융위기는 그 이후로 음모론의 단골 메뉴로 올랐습니다. 기아의 부도는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의 작품이라는 것이 하나의 음모론이고 다른 하나의 음모론은 미국과 영국이 IMF를 주력부대로 내세워 경제위기에 처한 한국, 홍콩,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에 금융지원과 경제정책 관여라는 융단폭격을 가하여 자국의 제조업 몰락 이후의 금융패권주의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경제적으로 튼튼한 홍콩에까지 전과 다르게 집요한 외환공격을 펼쳤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음모론은 어느 정도 타당한 구석이 있습니다. 삼성이 기아그룹의 부도에 얼마만큼 개입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으나 약해진 기아자동차를 헐값에 인수해서 자동차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은 명백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금융패권주의도 분명히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전략이지만 이들이 동남아와 우리나라의 금융위기 발생에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역시 알 방법이 없습니다.

 

1997년 10월 23일 홍콩증시의 하루 10%가 넘는 대폭락이 있은 후 한국의 주력 단기차입 시장이었던 홍콩의 금융시장이 막혀버렸습니다. 게다가 홍콩의 위기에 충격을 받은 일본이 단기대출금 220억 달러 중 130억 달러를 전격 회수했습니다. 일본과는 인간적인 관계로 맺어졌기에 위기상황에서 절대 돈을 급하게 회수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국내금융사는 한마디로 얼이 빠져버렸습니다. 일본에게 저주와 협박성 멘트를 날렸지만 일본도 8개의 금융기관이 도산할 만큼 어려웠고, 홍콩의 위기가 언제 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금회수가 불가피하다는 대답만이 있었습니다.


기아는 최초부도로부터 5개월을 정부와 밀고 당기는 게임을 벌였습니다. 수많은 납품업체와 협력업체를 거느린 기아였기에 혹시라도 도산하게 되는 날에는 연쇄도산으로 인한 여파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기아는 음모론과 여론몰이 그리고 대마불사를 믿고 계속 버티다가 12월 대선을 이용하여 다음 정권까지 끌고 가서 살아남는 방법을 도모 했으나, 무려 4조 5천억 원의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는 등 나라 경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며 10월 22일에 법정관리로 귀결되었습니다. 금융위기에 맞서는 가운데 대통령과 총리의 리더십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극심한 레임덕에 YS는 강제로 떠밀려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고건 총리는 금융위기 전 과정 동안 아예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관심은 모두 12월 대통령 선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11월에 총리가 우리나라는 IMF에 가지 않는다고 발표한 날 환율은 처음으로 1,000원대를 돌파했습니다.

 

1997 년 10월 신한국당의 경북지역 대선 필승결의대회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은 YS의 탈당을 요구하고, YS 마스코트에 대한 화형식 퍼포먼스를 연출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YS는 10월 21일 검찰에게 대선의 핫이슈인 DJ 비자금에 대한 수사 유보를 명령했습니다. DJ 비자금은 신한국당에게는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의혹에 맞불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기에 신한국당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당 차원에서 총재인 YS의 탈당을 공식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결국 YS는 11월에 자신이 만든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자신이 키운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11월 초부터 은행과 종금사들의 해외 차입 루트가 완전히 차단되자 이들은 한국은행에 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은행은 얼마 남지 않은 외환보유고를 은행과 종금사에 빌려주는데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월 1일에 제계 24위 해태그룹이 부도를 맞았고, 11월 4일에는 재계 27위 뉴코아 그룹이 부도를 맞는 등 우리나라는 심하게 흔들렸고 한국은행의 외환 담당자들은 이경식 총재에게 IMF 행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11월 10일에 총리는 IMF 행을 부정했고, 바로 그날 환율은 처음으로 1,000원대를 돌파했습니다.


이때부터 IMF의 지원을 공식 요청한 11월 21일까지, 정부는 IMF 행 여부를 놓고 내분과 극도의 혼선을 스스로 일으켰습니다. 강경식 부총리가 IMF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다음날인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사전 준비를 위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사흘 후인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는 경질되고 그의 후임에 통상산업부장관 임창렬이 임명되었습니다. 임창렬 부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종합대책을 발표했으나 IMF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 당시 혼선의 이유는 이후에 자세히 알려졌습니다. 일본의 금융사들이 단기대출금을 대거 회수해서 벌어진 외환위기인 만큼,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달러의 차입을 시도했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러시아 경제규모의 2배가 넘는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였고, 한국이 무너질 경우 일본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어렵지 않게 우리에게 수백억 달러를 빌려줄 수 있을 정도로 세계최대 외환보유국이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달러 지원을 검토하던 순간 미국이 긴급지원을 반대하는 압력을 일본에 넣었습니다. 미국 측의 논리는 일본이 한국에 아무리 많은 달러를 지원한다고 해도 한국 거시경제정책의 기본적인 틀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국가 경제가 살아날 수 없고 지원 자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강력한 정책변환과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 일본의 긴급지원을 반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기업, 금융을 망라한 경제시스템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의도가 더 많았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에 임창렬 전 부총리는 미국이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우리를 IMF로 보냈다고 증언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무렵 일본은 우리에게 달러를 빌려주려는 자세를 보였지만 미국은 개별국가 지원은 절대 안 되고 IMF를 통해서 수습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그렇게 주장했지만 우리가 IMF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미국 재무차관 립튼이 같은 호텔에 머물면서 계속 협상지침을 전달했습니다. IMF는 철저히 미국의 조종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은 애초부터 미국이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의도했다는 음모론이 얼마만큼 사실일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의도에 말려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의 무덤을 팠을 때 그들이 그 기회를 이용한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었다고 하기에는 대응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당국의 허점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펀더멘틀을 너무 믿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성장률, 물가지수, 실업률 등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준비도 없이 OECD에 가입하고 개방과 자유화를 확대한 것은 정부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원화 고평가로 인해 기업의 현금흐름이 악화된 것도 모두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의 탓입니다. 1996년에 GDP의 4.7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한 것도 우리의 탓이고, 기업의 연쇄부도 역시 음모론으로 접근하기에 무리가 많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정부 스스로 수십 개의 종금사를 승인해서 외환업무를 가능하게 했고, 이들의 외화 단기차입에 대한 어떤 규제나 한계도 없이 현지법인에서 무한차입을 허용했습니다. 게다가 종금사가 부도 직전에 몰릴 때까지 이들의 외화차입 규모와 운용에 대한 현황파악과 통계조차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금융환경이 매우 불안정한 상화에서 단기 외자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건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기업이 연쇄 도산하고 태국의 외환위기가 절정에 도달한 시점인 1997년 7월에도 정부를 비롯하여 국책 및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하반기의 경제가 호전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어디를 살펴봐도 단순히 미국의 음모라고 치부하기에는 정책담당자들의 무능함과 오래 전부터 누적되었던 고질적 폐단 같은 구조적 결함도 많았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원을 반대하고, 우리의 IMF 행을 주장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일본의 지원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IMF가 재정지원 같은 것 없이 우리의 단기외채를 중장기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처음부터 외환위기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 대신에 미국과 IMF는 구제금융으로 역대 가장 큰 규모인 580억 달러를 투입해서 우리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에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었고, 12월 3일에 굴욕적인 자금지원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협약 내용에는 긴축 통화 및 재정 정책, 금융구조조정, 기업지배구조 개선, 정보 공개, 무역자유화, 자본자유화, 노동시장 개혁 등의 광범위한 개혁과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금지원협약 결과 500억 달러가 넘는 돈이 수혈되었지만 외환시장은 더욱 흔들렸습니다. 국민들은 우리가 IMF와 맺은 협약의 내용에 큰 불만을 표시했고, 대선에서 유력한 당선 후보였던 DJ는 IMF와 재협상을 첫번째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그 당시 DJ 비자금에 대한 수사는 중단되었고,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의혹은 더욱 증폭되었고, 거물 정치인 김종필과 박태준은 DJ 진영에 합류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YS는 이회창에게 등을 돌렸고,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는 독자출마해서 이회창의 표를 크게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DJ의 IMF와 재협상 공약은 한국에 대한 국제금융계의 신뢰 위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로 그 공약은 순수하게 선거용이었습니다. 당선 후 DJ 정권은 IMF도 깜짝 놀랄 만큼 정부 주도아래 협약을 완벽하게 준수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환율은 유래 없이 치솟았고, 주가는 끝없이 하락했습니다. 구제금융을 요청한 11월 21일의 환율은 달러당 1139원이었지만, 대선이 끝난 후인 12월 24일에는 무려 1964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대로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절박한 YS 정부와 대통령 당선자 DJ는 그날 미국 재무부 립튼 차관및 IMF 나이스 국장과 합의에 임했습니다. IMF와 재협상을 하지 않는 것과 외국 자본에게 한국 경제를 완전히 개방하고, 대기업 구조조정 및 해고와 임금삭감을 받아들일 테니 일정을 앞당겨 지원자금을 조기 인출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로서 외환위기는 큰 고비를 넘겼고, DJ 정부로 대한민국 경제의 구조개혁 과제가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두주 후인 1998년 1월 5일에 KBS와 주택은행은 금모으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350만명의 국민이 참여하여 두달 동안 22억 달러 상당의 금 22톤을 수집했으며, 곧바로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IMF를 통해 한국의 구조조정을 실제로 맡은 사람은 미국의 재무장관 루빈과 재무 부장관 래리 서머스였습니다. 이들은 강제적인 고금리정책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극약과도 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고금리 정책 때문에 시중에서 정기예금 금리는 연 26%까지 치솟았고, 빚을 내서 투자나 사업을 하거나 집을 산 사람들을 절망 속에 빠트렸습니다.

 

IMF 체제 첫 달인 1997년 12월에는 서울에서만 한달 동안  1226개 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졌습다.1997년 11월부터 3년 동안 600개가 넘는 금융기관이 퇴출되었습니다. 전체 33개 시중은행 중 11개가 1997년 외환위기가 시작된 지 3년이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1997년 당시 30개였던 종금사들 중에서 70 퍼센트인 21개 종금사가 사라졌습니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1997년 말에 31만 7천명에서 98년 말에는 24만 1천명으로 줄었습니다. 일년 사이에 4분의 1이 감소한 것입니다. 은행권에서는 2년 동안에 14만 5천명에서 9만 7천명으로 32%가 감소했습니다. 은행 퇴직자 중에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으로 재취업에 성공한 것은 30%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도 속출했습니다.

 

IMF의 요구에 따라 우리 정부는 건전성과 투명성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걸고 자본의 국적은 불문에 부쳤습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했고, 칼라일 펀드는 한미은행을 인수했습니다. IMF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투기꾼에게 좋은 패러다임이라는 비아냥이 들렸습니다. 재벌개혁에 대한 압력도 IMF로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대다수 국민들은 재벌이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재벌과 금융개혁에 따른 구조조정에 투입된 막대한 공적자금은 모럴 헤저드의 만연과 자기책임원칙의 훼손을 가져왔습니다. 공적자금 157조 원 중 회수불능액이 약 70조 원으로 밝혀졌으며, 대부분의 부담은 국민의 세금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의 강도 높은 재벌개혁에도 불구하고 문어발식 그룹 경영과 총수 지배 경영이라는 재벌의 전통적인 기업조직의 근본 틀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재벌 체제의 본질에는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재벌의 재무구조와 수익성은 크게 개선되어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재벌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대한민국의 권력이 독재자나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나, IMF 이후에는 예전에 독재자나 대통령이 가졌던 권한이 주로 재벌총수에게 이양되었습니다.

 

국가가 재벌을 통제하던 시절이 지났지만 국가와 재벌의 유착관계는 여전히 재생되어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경제발전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가 재벌에 협조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최대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져 세계 시장경제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나라의 간섭과 통제를 넘어서는 거대한 초국가기업의 위치를 차지한 채 한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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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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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와!
장자량님을 볼라치면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시다는것을 매번 느낍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여러가지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단순글도 아니고 전문글을 이렇게 장문으로 올려 주심에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답니다,,,,
저희들은 그저 좋은글 올려 주시면 보는것으로 만족하지만 정말 감사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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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만일 누가 저더러 위와 똑 같은 글을 올리라면 언감생심 올리지도 못할 뿐더러
설령 올린다 해도 오늘 하루종일이나 걸려야 올릴 수 있답니다,,,,,
정말 장자량님의 박학다식과 고고탁 회원을 위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무한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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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량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자량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과찬의 말씀에 송구스럽고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에게 가장 한가한 열흘이었습니다.
저는 2002년에 IMF 구제금융 전체과정을 분석하는 정부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올린 글은 어떤 책이나 인터넷의 정보보다도 훨씬 정확하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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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하!
그러셨군요!
그래서 그렇게 정확하게 분석하시고 평가를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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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님의 댓글

no_profile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갑자기 장자량님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무한 초라해 짐을 느낀답니다,,,
저는 이나이 먹도록 그동안 뭘했고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참으로 대략난감입니다요!!!!!!
저는 그저 이때까지 살아 오기를 그저 남한테 욕안먹고 피해 안주고 저와 저의 가족 건강과 나라의 안녕을 위하여만
단순히 살아왔는데 장자량님을 보면서 많은것을 느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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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사관님의 댓글

no_profile 명수사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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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님의 댓글

no_profile 초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퍼온글 http://agora.media.daum.net/my/list?key=9Z5C2Xu2eyE0&group_id=1
지금은 전형적인 스태그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스태그가 먼지는 아시지요??? 
▶ 소득은 정체되어있는데(=저성장) 중에 물가가 뛰어 오르는 현상입니다.
맨날 인플레이션이 안 생겨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나 찌라시들은 하고 있는데 ㅋㅋㅋ
아마 장 보러가시면 식료품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걸 아실겁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산품은 공급과잉상태에 빠져 제살 깍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어 가격이 오히려
  떨어졌지만요 ㅋㅋㅋ/ 뭐 치킨게임 끝나고 망할 데 망하면 공산품 가격도 튀어오르겠지만요 ㅎㅎㅎ
※ 앞으로 국제유가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선물시장에서 찍어누르기 신공/ 세일가스 개발로
    인한 공급과잉상태로 만들어 가격을 다운시켰지만 ㅋㅋㅋ  언제까지 그것이 가능할련지요~~~
▶ 그리고 스태그 상황이되면 머닝이가 맨날 말한 인플레이션 효과(비용 인플레)로 인해 어쩔수 없이 금리가
오릅니다  (즉 시장금리에 이끌려 기준금리가 따라 올라가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즉 비용 인플레이션 →  스태그  → 부채 디레버리징  (이 순서대로 가게 됩니다)
▶ 이걸 막으려면 선제적으로 급속한 금리 인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못 하잖아요 ㅋㅋ (할 수가 없겠지요)
ps) 제가 이전에 쓴 글중에서 북한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강하다고 쓴 글이 있을 겁니다.
      이번 북미대결은 유심히 보세요 ~~~ 이전과는 다르니까요 ~~~
      뭐 설마 북한이 장사장포로 댕민국을 강타하지는 않겠죠 /

그렇지만 이번 북미대결이 평화협정으로 가게 되면 주한미군은 짐 쌉니다. (그게 조건이니까요)
      ▶ 그러면 주한미군만 짐을 쌀까요???  아님 외인자본도 같이 짐을 쌀까요???
          외인자본도 짐을 싸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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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수님의 댓글

no_profile 강청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 편의 글을 올리시는데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분석하시고, 정성을 들여 글을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편의 논문이십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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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탁님의 댓글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논문 수준입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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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량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자량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연휴 지나면 이렇게 자주는 못올리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이런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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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님의 댓글

no_profile 민진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호기심도 생기고 분노도 생기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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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59님의 댓글

no_profile hok59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려웠었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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