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단추, 포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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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이렇게 지극히 세속적인 형이하학적 상황에서 그토록 지극한 형이상학적 의문이 도출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렇게 뼈와 살이 녹는 듯한 에로틱한 분위기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신비로운 능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과 뜨거운 입김. 내 세포 하나하나 근육 한 올 한 올은 이제 물에서 갓 잡아 올린 숭어처럼 펄떡이며 전율에 휩싸였다.
저 먼발치에서부터 서서히 내 영토 한가운데까지 차근차근 세심하게 적셔오는 그녀의 부드러움은 모든 것을 체념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모르던 내 몸의 비밀을 하나 둘씩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남자임이 분명했고, 그녀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발끝부터 시작된 욕망의 채찍질은 온 몸을 휘감아 돌더니 마침내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 시간에 이르렀다. 인간이란 간사한 존재인가. 몸의 주는 쾌감에 마음은 경계를 허물 수밖에.
푸른 평야처럼 늘씬한 그녀의 다리와 잘록한 허리, 실루엣만으로도 미모가 짐작되는 뒷모습하며.
손 안에 살포시 쥐어지는 농익은 복숭아,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황홀한 유혹. 손이 닿지 않는다. 입이 벌려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사로잡힌 포로인가. 모든 것은 그녀가 결정하는 것.
견디는 것이 쾌락인가 고통인가. 더는 견딜 수 없는
거세게 일어서고 싶다. 강하게 분출하고 싶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전화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입맛이 쓰다. 낮잠이 줄 수 있는 선물 치고는 대단히 황홀한 영화였던 듯.
탁구장으로 나오란다.
K의 전화에 탁구장으로 향하니, 훈련 분위기가 매우 농익어있다. K와 노교수님께서 초보 동호인들과 한창 연습 중.
K. 자타 공인 허름한 탁구장의 최고수. 꽤 오래전 이 작은 도시의 취미 탁구계에 데뷔, 순식간에 1부에 올랐으나 홀연히 사라진 후 초보들의 친구로 활약하는 전설적인 인물.
노교수님. 대학 교수를 은퇴하신 탁구 고수, 요즘 독립운동가 발굴에 매진하시는 틈틈이 허름한 탁구장에서 탁구를 즐기는 초보들의 멘토.
무슨일인가 싶어 K를 보니 레슨 테이블을 가리키는데. 오~ 마이~ 갓~, 나의 첫사랑 선생님께서 레슨을 받으시는 중. 오호, 선생님의 레슨이 끝나면 내가 선생님의 연습상대가 되라는 뜻? 이런 행운이 드디어 나에게.
얼마 전 이 허름한 탁구장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으나 선생님은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는 듯.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흠, 이런 기막힌 일이.
해서, 레슨 테이블 옆으로 향하니, 우리 코치가 지도하고 있는 것은 포핸드.
포핸드는 이렇게 치시는 것인데, 포핸드를 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공에 회전을 주는 타법과 공에 회전을 주지 않는 타법.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공에 회전을 주는 방법이므로 먼저 이 방법으로 연습하실 게요 라는 코치의 설명. 회전을 주지 않는 방법은 차후에.
간결한 폼으로, 공이 테이블에 맞자마자 가볍게 넘깁니다. 이 방법이 익숙해지시면 방어와 공격, 즉, 포핸드 블록, 포핸드 롱, 포핸드 탑스핀 이런 것들이 한 가지 스윙으로 모두 해결된다는 코치의 추가 설명.
10분 넘게 기다렸던가. 레슨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로 오셨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듯.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첫 단추를 잘 채워야 마지막 단추를 잘 채운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 생각은 좀 다르다는.
첫 단추를 잘 풀어야 마지막 단추도 잘 풀 수 있는 법. 으흐흐.
그렇게 선생님과의 첫 번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탁구 초보 선생님께서 이리 저리 보내는 공을 일정하게 넘겨드리며, 이 시간을 위해서 수십 년을 뛰어넘은 것인가 하는 생각. 중학생이었을 때, 내게 수학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세월이 스쳐간다.
그런데, 탁구를 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그 모습에 도취되어 나도 모르게 공넘기는 것을 실수하기도 했다는. 이런, 내 속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선생님을 이성으로 바라보는 나의 음흉한 의도를 들키면 안되는데.
물론 선생님께서는 내 속마음을 아실 리 없으니, 그저 초보와 연습을 해주는 친절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하시는 듯.
한 시간 정도 연습했을까. 선생님께서 땀에 푹 젖으셨다. 음, 연습을 통해 선생님의 포핸드 실력이 향상되셨다는 생각보다는 젖은 유니폼이 선생님에게 더 밀착되어서 선생님이 더 섹시하게 보인다는 것이 내겐 문제였다.
우리의 연습이 마무리 되어가 차, K와 노교수님과 함께 연습하던 분들도 연습이 마무리 되러가고.
누군가 어찌어찌 이야기가 나와서 우리 모두는 연습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시장 골목 송 여사네 전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모듬전을 주문하고, 막걸리, 맥주, 소주, 취향에 맞게 술을 주문하니, 내겐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것이 선생님께서 바로 내 앞에 앉으셨다는 것 아니겠는가.
넘나 예쁘시다. 나보다 여러 살 나이가 많으신데, 나보다 어려 보인다. 대박. 한 미모 하는 송 여사도 선생님에 비하면 보름달에 반딧불 정도랄까. 선생님으로 인해 내 자리까지 환해지는 듯. 이건 결코 나만의 생각은 아니라는. 이미 허름한 탁구장 몇몇 형님들이 선생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술이 몇 잔 돌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누군가 선생님에게 묻기를 어떻게 탁구를 시작하게 되었냐고.
선생님의 대답이 뜻밖인 것이. 조금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러 탁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선생님 말씀에 또 누군가 권유하기를 외로움을 느끼신다면 강아지라도 키워보시면 어떻겠냐는.
인간은 개와 대화할 수 없답니다. 다만 길들일 뿐이지요. 저는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었다고 하시는 선생님.
오우 선생님 정말 뜻밖의 말씀. 제가 대화상대가 되면 안될까요 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데, 또 누군가 K에게 묻기를 고수가 되려면 어떻게 탁구를 쳐야 하나요하고 물으니,
K, 진지한 것인가, 장난 끼가 발동한 것인가. 그 대답이 복길이라는데? 엥 전원일기 복길이?
댓글목록
정다운님의 댓글
정다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벽님께서 드뎌, 본연의 자리로 돌아 오셨군요!
넘 축하드리고 이제부터 앞으로는 제발 그쪽 세계에 발을 담그시기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게속 이렇게 탁구에 관한 좋은 소설과 시와 수기들을 올려 주시기를 거듭 바랍니다.
강벽님께서 올려주신 좋은 글 넘 감사드리며 잘 보고 갑니다.
고고탁님의 댓글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목이 기가 막힙니다.
첫사랑 첫단추를 포핸드로...
나이 들어 저렇게 정념이 불타오른다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집의 송여사가 보름달에 반딧불 정도라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