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법관 김홍섭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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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법관 김홍섭을 아시나요?
1965년 3월 16일 하오 2시 20분, 김홍섭은 향년 51세를 일기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임 중이었다.
마지막 병상에서 그는,
“막상 [죽을 때를] 당하니 죄가 왜 이렇게도 많은지” 라며 자신의 일생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뒤돌아보았다.
평소 산을 좋아해, 김홍섭과 유독 가까운 사이였던 장순룡(1922년생, 전 광주고등법원원장)이 쓴 <김홍섭씨의 불가사의>에 그런 말이 나온다(최종고, 1985, 235쪽).
판사라는 직업상 평소 타인의 죄를 정죄해왔으나
김홍섭 자신 또한 죄 많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솔직한 고백,
여기서 우리는 인간 김홍섭의 참모습을 본다.
그가 남겨놓은 수첩을 자세히 살펴보면,
김홍섭은 홀로 있을 때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춰내어 스스로를 힐책할 때가 많았다.
전언에 따르면 김홍섭의 모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후리후리한 큰 키에 머리카락이 새까만 사나이였다.
유난히 큰 코가 인상적이었고,
두 눈두덩은 깊이 파여 한 눈에 보아도 심사형(沈思型)임이 짐작되는 이였다.
이런 이목구비에 걸맞게 얼굴이 길었다.
표정 역시 근엄한 모습일 때가 많았다.
그는 다리가 길어,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조차 보통사람은 따라가기 어려웠다.
황새 같은 한 사람의 선비였다.
몸집이 빈약해보였고,
표정이 침착하기만 한 그는 마치 “깊은 호수에 푹 가라앉은”(장순룡, <김홍섭씨의 불가사의>; 최종고, 1985, 234쪽) 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겉모습에서 짐작되듯,
김홍섭은 사색을 즐기는 수재였다.
과연 그는 몇 권의 눈여겨볼만한 저서를 남겼다.
시집 《무명(無明)》(통문관, 1954)과 수필집 《창세기초(創世記秒)》(육성각, 1954)를 한 해에 연달아 출간하였고,
몇 년 뒤에는 다시 두꺼운 한 권의 수필집 《무상(無常)을 넘어서》(정음사, 1960)까지 세상에 내놓았다.
김홍섭의 저작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볼 때 실로 광범위하였다.
시와 수필이 있는가 하면,
전문적인 논문, 꽁트, 소설, 희곡에 시조까지 빠짐없이 갖추었다.
섭렵한 분야도 넓어,
법학과 신학,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자유자재로 출입하였다.
그런데 그가 받은 정규 교육은 기껏 5년에 불과하였다.
초등교육 4년에 대학(전문대학) 1년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김홍섭은 남달리 박학다식하였고,
창작력이 뛰어났다.
그는 후세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것만 따로 모아도 소책자 하나는 될 성싶다.
거개가 그의 청렴한 성품을 반영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요즘처럼 물자가 넘쳐나고, 물욕을 자랑처럼 떠벌이는 세상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들이 대부분이다.
처갓집에서 보내준 쌀을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법관은 한국사회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직업이다.
김홍섭은 그런 법관노릇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이지마는,
평생 한 번도 새 양복을 맞춰 입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직무상 양복을 자주 입기는 했으나,
그것은 모두 시장에서 헐값에 구한 중고품이었다.
더러는 법무장관까지 지낸 장인이 입던 양복 상의를 물려받아,
자신의 야윈 몸에 맞게 품을 줄인 것도 있었다고 한다.
겉옷으로 걸쳐 입던 김홍섭의 ‘오버 코트’는 미군의 야전 모포에 검정물감을 들여서 만든 것이었다.
신발 역시 제대로 된 가죽구두를 신어 보지 못하였고,
대신에 ‘비닐’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아예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도 많았다.(윤형중, 1971, 526쪽)
이러한 일화의 시대적 배경은 1950-60년대였다.
그때는 한국사회 전체가 가난에 신음하였다.
그러나 김홍섭처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치와 호사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사회지도층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시절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김홍섭도 얼마든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궁상’을 벗어나지 못한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눈에 비친 김홍섭은,
‘사서 고생하는 바보’였다.
김홍섭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애쓰는 사람이었다.
동료법관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1965년 1월, 월간지 《신동아》는 당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법조인 11인’의 명단을 선정하였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그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배정현, 이병린, 양회경, 조진만, 한성수, 백한성, 방준경, 이영섭, 나항윤, 최대교 등과 나란히 김홍섭이 법조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 것이다. ...
김홍섭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별명이 있다.
장면 전 총리가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여,
‘사도법관’이라고 했다.
준엄한 법률을 따르면서도 종교적 사랑을 실천하여,
마치 그리스도의 사도(使徒)와도 같았다는 뜻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잠시 소개한다.
1961년 10월, 김홍섭이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그는 이른바 ‘경주호 납북기도사건’의 항소심 선고공판을 주재하였다.
5분 정도 묵념하듯 엄숙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공산주의자로서 무고한 양민을 북한으로 납치하려했던 피고인들에게 그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김홍섭은 ‘사도’에게나 기대할만한 발언을 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불행히[도] 세계관이 달라서,
여러분과 나는 [각기 재판장석과 피고인석에 서는 식으로] 자리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박찬일, <사랑과 청빈이 진인>; 최종고, 1985, 98쪽)
재판장이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를 취하자,
피고인석에서는, “이런 분한테 재판을 받아봤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하종대, 1997, 255쪽)며 울먹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홍섭은 인간의 의지와 판단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재판 결과에 항상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절대자인 신의 가호가 없다면 누구도 재판을 옳게 진행하기 어렵다고 그는 믿었다.
자연히 재판정에서 그의 자세는 유달리 숙연했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참여하는 재판정은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시윤, 2007, 6쪽)
김홍섭에게는 여느 법관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남다른 면모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법관의 사명에 대한 이해 역시 남달랐다.
그는 피고인의 유죄여부를 따지는 데 법관의 사명이 국한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죄인의 영혼을 교화(敎化)하는 것까지도 법관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틈만 나면 그는 여러 교도소를 방문하였고,
특히 사형수들을 면회하였다.
대개의 경우 사형수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의 유혹에 떨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김홍섭은 막무가내인 이런 사형수들을 만나서,
끈기 있게 감화시켰다.
그들을 절대자(=신) 앞에 속죄하도록 인도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것,
여기에서 김홍섭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세계사법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김홍섭에게도 크고 작은 인간적 약점이 없지는 않았다.
동료들 중에는 그를 오해하거나 비웃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무취미하다’고 나무랐다.
도무지 ‘멋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하는 경우도 있었다.(김동현, 1985, 79쪽)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술도, 담배도, 여자도 전혀 모르는 순내기 촌놈으로 통하였다.
‘촌놈’ 김홍섭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김홍섭은 변태인물, 무능한 사람 또는 기인이었다.
또, 그를 일컬어 ‘형사 밖에 모르는 판사’라고 비판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그는 재판정에서 민사사건을 취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사사건에만 매달렸다.
이것이 법관으로서 그의 출세를 더디게 하였다.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가난한 법조 시인이란 소리도 들렸다.
그의 종교심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김홍섭을 가리켜
“하느님에 미친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김홍섭이야말로 선을 가장한 위선자라고 욕했다.
결코 달가울 리가 없는 온갖 비방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홍섭은 묵묵부답이었다.(장순룡, <김홍섭씨의 불가사의>; 최종고, 1985, 232-233쪽)
변명을 한다고 해도 지극히 단순하였다.
“본시, 나는 술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간혹 모임 좌석 같은 데에서 그 일로 해서,
혹 공격이나 희롱을 당하는 일이 없지가 않다.”(김홍섭, 1981, 3쪽)
이렇게 말하고는 끝이었다.
일부의 몰이해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김홍섭의 삶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장례식장에는 진귀한 풍경이 목격되었다.
사형수로서 그 덕분에 가톨릭교회의 영세를 받은 대자(代子)가 10여 명이었다.
그들의 사진이 김홍섭의 영정과 나란히 장례식장을 조용히 빛냈다.
사족: 판사나 검사를 지낸 분들 가운데는 훌융한 분들도 많지요.
그분들은 유난히 겸손하고 공정하며 청렴한 언행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어찌된 까닭인지
멧돼지도 같고 괴물도 같은 몇몇 전직 판사와 검사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교양도 없고 천박한 얼굴을 번들거리며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방약무인의 그들에게는 세상사가 너무도 쉽고 만만한가 봅니다.
다소곳이 고개 숙인 사도 법관 김홍섭의 엄숙하고도 다정한 얼굴이 너무나도 그리운 아침입니다.
댓글목록
으아님의 댓글
으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김홍섭님 같은 분이 지금 시대라고 왜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런 분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지요. 대부분은 인간탐욕의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제도를 정비해서 그런 개인의 탐욕이 사회에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목표죠.
라윤영님의 댓글
라윤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법복을 입은 전두환이가 활개치고 다닌다고 누가 그랬습니다
김홍섭 사도법관을 제발 본 받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