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탁구 이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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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탁구 라켓을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잡은
라켓을 "나의 탁구 이상형"이라 부르짖습니다. "이거야, 이거!"
모든 방황은 끝났고, 이제 수미산처럼 우뚝 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여러 사이트에 사용기를 올리고, 사람들에게 자랑질도 일삼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갑니다. 행복한 밀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탁구장에서 "나의 탁구 이상형"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직접 당합니다. "어,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반문을 해봐도 감각은
이미 너무 익숙하기만 할 뿐 신선한 데가 없습니다. "나의 탁구 이상형"을
난생 처음 불신의 눈초리로 내려다봅니다. 그래도 언제나 우직한 "나의 탁구
이상형"은 여전히 묵묵부답일 뿐입니다.
집으로 향합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처박아 뒀던
라켓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합니다. "나의 탁구 이상형" 때문에 나의 총애
를 받지 못했던 녀석들입니다. 막상 꺼내놓고 보니, 언제 그렇게나 많이
사들였는지 놀랄 지경입니다. 이윽고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고, 어떤 것은
약간 손을 보기도 합니다.
다음 날 다시 탁구장으로 갑니다. "나의 탁구 이상형" 때문에 외면당했던
어떤 라켓으로 탁구를 쳐봅니다. "어, 이상한데. 감각이 왜 이렇게 좋아졌지?"
반문을 하면서도 연방 웃음 짓습니다. 다시 탁구가 신통하게 느껴집니다.
게임을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드라이브 한방이 잘 먹혀서 껄끄럽던 상대를
시원하게 물리칩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녀석은 과거의 "나의 탁구 이상형"
이었습니다.^^
**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탁구용품 사이트의 사용기를 읽습니다.
"나의 탁구 이상형"을 칭찬하는 글입니다. "호오, 그래, 그랬지. 러버는 다소
가리지만 거의 만능에 가까운 올라운드 플레이가 가능하지."
날이 밝았습니다. 탁구장에서 다시 한번 "나의 탁구 이상형"에게 기회를 줘
봅니다. 어제 다른 라켓으로 쳐서 그런지 몰라도 "나의 탁구 이상형"이 약간
삐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드라이브 잘 걸리고 상대 공격을 블록 잘 하고
카운터도 곧잘 받쳐주지만, 웬지 2% 부족한 기분입니다. 왜 그런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제 쳤던 라켓으로 쳐봅니다. 확실히 감각은 싱그럽고 탄탄하고
새삼스럽습니다. "어, 이상한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반문을 해봐도
이유를 알기는 힘듭니다.
탁구를 하다 보면, "나의 탁구 이상형"이란 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나의 탁구 이상형"에 실망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의 탁구 이상형"은 일종의 '실연'을 당하는 위험이
상존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현재의 "나의 탁구 이상형"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하면, 또 '팽'했던
과거의 "나의 탁구 이상형"을 들고나옵니다. 그럼 참 놀랍게도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비교 체험>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차이'를 '차이' 자체로 느끼기 보다는 어떤 다른 것과의 비교에서
느끼곤 합니다. 가령, 로린 킹을 쓰는 펜홀더 유저는 어느날 사이프레스 S를
우연히 사용하면서 미묘한 감각의 차이를 느낍니다. 셰이크핸드 유저라면,
더욱 더 이런 현상을 많이 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탁구는 항상 미세한 '차이'를 잘 느끼도록 자극하는 스포츠입니다.
왜냐하면 잠재적으로 늘 <비교 체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순간 감각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일 때, "나의 탁구 이상형"
으로 우대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차이'의 신선한 시간들을 즐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의심과 고뇌와 결별과 재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비록 "나의 탁구 이상형"과의 밀월이 <비교 체험>의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행복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길은 끝이 없고 항상 다음 코스로 이어지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항상 '지금
여기'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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