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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들...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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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앨범]여러 빛깔 아름다움 이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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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곱다. 너무 예뻐 얄미울 정도다. 동그마니 앉은 모습이 어찌 그리 앙증맞은지. 마치 정성들여 깎아놓은 조각품처럼 깨끗하다. 아름다움이 넘치는 스무 살 처녀 시절, 어느 한 곳 흠잡을 데가 없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천연색 같다. 그래서 표현도 다양하다. 흔히 쓰는 말만 해도 10여 가지는 된다. 청순미, 가련미, 관능미, 지성미, 섹시미, 노련미, 백치미 등. 뿐만 아니다. 꽃이나 과일, 들꽃 등 자연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도 여자에 비유하면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설명하기 힘든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그녀, 이혜숙은 지니고 있다.

그녀는 절제된 미인, 맺고 끊는 맛이 있었다. 20대엔 생동감이 넘쳤다. 안쓰러울 만큼 가녀렸지만 생기를 발산했다. 작고 붉은 입술을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청순함으로 일본 중년 남성들의 애간장을 태우며 건강한 30대를 맞이한 그녀는 생생미에 노련미까지 더해 아름다움의 빛깔이 더욱 화려해졌다. 이제 40대,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식을줄 모른다. 브라운관에선 더러 '푼수끼'를 발휘하지만 그녀의 중년엔 조용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때는 무슨 일이(1983년)

해태 한국시리즈 우승

베이징에 나비가 날면 미국 증시가 출렁인다. 사실 그렇겠느냐마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해태가 막강 MBC청룡을 일방적으로 누르고(4승 1무)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해태를 이끈 맹장은 먼 훗날 신화가 된 김응룡 감독. 상대적으로 약했던 해태가 김동엽 감독의 청룡을 잡은 이유 중 한 가지는 때맞춰 발생한 아웅산폭탄테러 사건.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겨냥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한국시리즈가 제때 열리지 못했고 그 사이 MBC 선수들은 보너스 문제로 자중지란을 일으켰으며 한국시리즈가 열릴 때쯤 감독, 선수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해태 우승 신화의 시발점이 된 1983년 한국시리즈의 뒤에는 야구와는 전혀 관계 없는 아웅산 사건이 있었다.

 

 

[강태규 그때 그사람] 배연정… 배일집과 명콤비 얼짱 코미디언
[스포츠투데이 2004-05-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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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코미디 5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남녀 콤비를 꼽으라면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연정-배일집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70∼80년대를 관통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빼어난 호흡을 추억하는 팬은 한때 이들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연기호흡은 탁월했다. 데뷔 당시에도 배연정(본명 홍애경·1953년생)은 코미디언으로서 상당한 미모에다 재치와 순발력까지 지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19세 때의 배연정 사진이 최근 인터넷에 공개되자 네티즌이 열광하고 있다. 사진 속의 배연정은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청순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단아해 지금의 젊은이에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1년 당시 MBC 입사지원서에 쓸 사진이 필요해 사진사에게 콧등의 점을 지워 달라고 한 이 사진은 그녀의 후배에 의해 인터넷 바다에 띄워졌다. 65년생인 한 네티즌은 배연정이 자신의 이상형이었다며 전성기 때의 코미디 연기를 다시 보고 싶다는 애절한 사연을 올려놓아 그녀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72년 TBC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하기 전 가수로도 잠시 활동한 이력을 가진 배연정은 TBC ‘명랑극장’ ‘코미디쇼’에서 다재다능한 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후 MBC ‘웃으면 복이 와요’ ‘폭소대작전’을 통해 배일집과 콤비 호흡을 맞추며 최고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자리매김했다.

시대가 흐르고 새로운 트렌드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에 의해 콩트와 만담식 코미디가 외면받고 시트콤과 가수 개그맨이 뒤섞인 토크쇼가 인기를 끌면서 서서히 그녀의 활동무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97년 IMF 때 남편 사업의 예견치 못한 부도로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그 충격을 이기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배연정은 곤지암에 소머리 국밥집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어려웠던 가정형편은 그녀를 더욱 근검절약하고 억척스럽게 만들었다. 개업 6년 만에 배연정 부부는 당당히 재기에 성공했다. 아픔과 어려움을 너무나 절실히 체험한 그녀였기에 눈길을 불우한 이웃에게 돌렸다.

지난 2002년 남부지역을 강타한 태풍 ‘루사’로 이재민이 속출했을 때 1,500인분의 식사를 들고 김천시 대덕면을 찾아 위로,주변을 훈훈하게 했다. 그동안 남몰래 고아원과 양로원 등지에도 따뜻한 손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방송출연과 공연준비에도 게으름이 없어 그녀는 늘 시청자에게 잊혀질 수 없는 성실한 연기자로 남아 있다.

지난 90년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하는 한국방송대상 코미디부문을 주병진과 함께 수상한 배연정은 2002년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코미디연기 특별공로상을 수상해 건재함을 과시했다.<금요일 연재>

연예칼럼니스트 강태규 ellong8273@naver.com

 

[강태규 그때 그사람] 안소영 38인치가슴 80년대 에로여왕
[스포츠투데이 2004-05-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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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치는 빗발에 흥건히 물든 속옷. 김이 모락모락 날듯한 매끄러운 몸매. 흠잡을 데 없는 육중한 가슴은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여체의 굴곡은 말이 요동칠 때마다 한없이 뒤틀린다. 숨막히는 객석에서는 그녀의 파격적이고 저돌적인 몸짓에 손은 이내 땀으로 얼룩지고 만다.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심야 영화관이 처음 생겼던 1982년. 애마부인 안소영(본명 안기자·1959년생)은 가슴 하나로 그렇게 관객들을 무참히 덮쳐버리며 전국을 강타했다.

한국 에로영화의 빗장을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1대 애마’ 안소영은 조연 배우로 5년 동안 충무로를 전전하다 애마부인 한 편으로 일약 빅스타로 떠올랐다.

161㎝로 비교적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21인치 허리와 38인치의 가슴 사이즈는 그녀를 더욱 육감적이고 풍만하게 만들었다.

‘애마에게 옷을 입혀라’라는 영화포스터 카피로 국민들을 충분히 자극시킨 애마부인(감독 정인엽)은 당시 서울 관객 31만명이라는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했을 뿐만아니라 그후로 1995년까지 10편의 후속 영화가 이어졌다. 또 오수비 김부선 유혜리 하유미 이화란 등 걸출한 스타들을 속속 배출했다. 한국 영화 사상 10편의 속편이 제작된 건 초유의 일이었을 만큼 애마부인은 한국 에로 영화 시장을 재편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후로 ‘뽕’ ‘어우동’ ‘무릎과 무릎사이’ ‘매춘’을 비롯 ‘산딸기’ 시리즈와 ‘빨간앵두’ 시리즈가 제작돼 에로 영화 봇물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954년 영화 ‘운명의 손’(감독 한형모)에서 배우 윤인자와 이향이 2초의 키스신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1957년 영화 ‘황진이’(감독 조긍하)와 ‘전후파’(감독 조정호)에서 도금봉이 치마끈에 눌린 젖무덤이 드러난 일과 윤인자가 목욕하는 장면에서 살짝 보여진 젖무덤이 당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고 하니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박장대소할 일이다. 늘 비슷한 구도를 담아온 에로영화는 그렇게 시대의 변천사를 몸소 담아내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쉬 느끼게 한다.

세월은 몸을 늙게 하는 법. 톱스타 안소영도 에로 배우 이미지가 고정돼 한동안 영화 활동이 순탄치 않았다. 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감독 박광수)로 7년 만에 컴백했고,‘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도 출연했으나 강렬한 에로 배우 이미지를 스스로도 꺾지 못했다.

 깔끔한 성격과 대인 관계가 원만했던 안소영은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서 의상실 ‘안소영 콜렉션’을 운영하던 지난 98년,돌연 그 모습을 감추었다가 2000년 뉴욕 인근에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소식이 교민 사회에서 흘러나왔다. 그동안 공식적으로 결혼이 보도되거나 알려진 사실이 없어 그 궁금증은 더욱 무성했지만 그녀를 잊지 않았던 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실천할 엄두도 못내던 그 시절. 닫힌 성적 상상력을 몸으로 말해 일약 섹스심벌로 8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안소영. 터질 듯한 그녀의 몸과 눈빛은 많은 젊은이들의 생각 속에서 끝없이 끌려다녔을 것이다. 아,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여….

/연예칼럼니스트 강태규 ellong8273@naver.com

 

[추억의 스타앨범]흑장미 미인의 향기 윤미라
[뉴스메이커 2004-07-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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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다. 170㎝의 큰 키가 주위를 압도했다. 아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버린 것은 이지적이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터.

50세를 훌쩍 넘긴 지금도 미인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 윤미라씨.

'정 때문에'라는 TV드라마에서 새우젓 가게 주인으로 분해 가난에 찌든 우리네 어머니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귀여운 여인'에서는 푼수끼 있는 꽃뱀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던 영락없는 아줌마. 극중의 그녀를 보면 좀처럼 화사했던 젊은 시절이 떠오르지 않겠지만 윤미라의 20대는 정말 흑장미 같았다. 

서구적인 화려함과 동양적인 다소곳함을 같은 얼굴에 담은 청순미인. 그래서 '덩치'가 큰데도 발탁되었고 사극, 현대극 어디에도 잘 어울렸다. 한때의 바람으로 잔인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때도 그녀는 당당했고 그녀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그 순간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하긴 아픔없는 사랑은 동서고금을 통해 단 한번도 없지 않았던가.

대종상 신인상(1973년), 대종상 여우주연상(1977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1978년)을 수상한 은막스타. 그녀에게 젊은 날의 일진광풍은 그저 인생반전의 계기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무슨일이(1976년)

2개의 올림픽 이정표

2개의 올림픽 이정표가 세워졌다. 양정모(조폐공사)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에 국민은 열광했고 수많은 성금이 답지했다. 하지만 감동과 흥분의 시간이 지나자 거액을 약속했던 유명인사들은 꼬리를 내려버렸고 양정모의 수중은 금메달 따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된 양정모는 평직원에서 과장으로 특진했으나 그 역시 그때뿐이었다. 양정모는 만년과장이었다. 여자배구가 구기사상 처음으로 메달(동)을 획득했다. 조혜정, 변경자 등이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추억의 스타앨범]요염한 팔방미인 김보연
[뉴스메이커 2004-07-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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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주간지 사진기자들은 정말 '막강한 힘'을 지녔던 모양이다. 추수가 끝난 가을 논에서 톱스타의 수영복 사진을 찍을 정도로....

9월 말이면 제법 한기가 드는 기온. 굳이 수영복을 입혀 짚더미 위에 누우라고 할 것까진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여배우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명이 아닌데도 '기왕지사 찍는 것'이라며 어깨 끈까지 슬쩍 풀어버렸다.

1982년이면 김보연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 스물다섯의 그녀는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물오른 연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톱스타였다. 그런데도 '팬들을 위해서'라는 기자의 꼬임에 넘어가 야시시한 포즈를 취하고 말았다.

짚더미 위의 수영복 여인. 보일 듯 말 듯한 젖무덤. 독자들은 사진이 실린 주간경향을 놓고 이리 훑고 저리 훑었다. 평면 위의 사진이니 달리 본다고 안 보이던 게 보일 리 없건만 그냥 그렇게 한 번 해봤다. 그때만 해도 볼 게 별로 없었다.

최근 아홉 살이나 아래인 후배 탤런트와 결혼,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는 김보연씨. 온갖 푼수 다 떠는 TV 드라마 속의 그녀를 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연상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 하지만 그는 여고 얄개(1977년)를 할 정도로 재기발랄하기도 했고 '꽃밭에 나비' '여자의 이 아픔을' '오마담의 외출'을 훌륭하게 연기한 대단한 여배우였다. 게다가 노래를 취입, 가요제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그야말로 팔방미인. '짚더미 위의 요염한 미인'은 이제 가고 없지만 그녀의 세월은 지금도 한창이다.


그때는 무슨 일이(1982년)

전두환의 '눈엣가시' 김대중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16일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복역 중인 김대중을 병원으로 옮겼고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김대중은 1주일 후인 23일 출국했는데 2년 전인 1980년 9월 17일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죽을 목숨을 살려줬으니 그런 '은덕'이 어디 있느냐고 했지만 사실은 국제여론 때문에 미워도 김대중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강태규 그때 그사람] 김진아 ‘수렁에서 건진 내딸’로 톱스타 등극
[스포츠투데이 2004-07-0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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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당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신인 여배우는 누구였을까?

굳이 요즘으로 비교해 말하자면 문근영,박한별을 능가하는 인기로 대중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은 여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김진아(1963년생)다. 검게 그을린 듯 구릿빛 피부와 서구적인 강렬한 마스크를 갖춘 그녀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출중한 연기력과 끼를 마음껏 분출시켰다. 거침없고 당찬 이미지를 선보인 김진아는 당시 최고의 여배우로 각광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말 골든타임 쇼오락프로그램의 여자 진행자는 응당 급부상한 톱스타의 몫이었으니 바로 김진아의 자리였다. 당시 간판 쇼오락프로그램이었던 ‘MC-쇼 일요특급’과 ‘토요일 즐거워’를 통해 4년 동안 김진아는 안방 시청자들에게까지 폭넓은 사랑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드봉화장품 CF모델로도 발탁될 만큼 그녀는 전형적인 스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김진아를 정상에 올려 놓은 것은 바로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감독 이미례)이었다. 수도여고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김진아는 콜로라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재학 중 잠시 귀국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겨울여자’(주연 장미희)의 김호선 감독을 만나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당시 청소년 비행물을 다룬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 출연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보여주었던 김진아의 강렬한 눈빛 연기와 거침없는 다이얼로그는 배우로서의 그녀를 높이 평가하는 데 이견이 없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했는가. 지난 98년 작고한 영화배우 김진규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으니 대를 이어 명연기를 펼친 셈이다.

김진아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수렁에서 건진 내딸’은 그 인기에 힘입어 2년 뒤 속편으로 이어졌는데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지금의 톱스타 김혜수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김진아는 그후로 ‘창밖엔 잠수교가 보인다’ ‘야훼의 딸’ 등을 비롯해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색깔 있는 연기자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 나갔다.

지난 2000년,미국의 한 금융인과 국제 결혼을 한 김진아는 최근 아기를 입양해 키우겠다고 공식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떳떳하고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보여준 김진아의 그 대담하고 리얼한 연기의 향기를 못내 그리워하는 수많은 팬들은 그녀의 화려한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김진아의 그 거침없는 대사와 강렬한 눈빛을 말이다.

/연예 칼럼니스트 강태규 www.writerkang.com

 

[강태규 그때 그사람] 최백호, 연륜 담긴 깊은 목소리
[스포츠투데이 2004-06-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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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연륜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어릴 적,록음악을 제외하고서는 음악을 논하지 말라는 편견은 결국 가수 최백호에게서 무너지고 말았다. 한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렴풋한 직감이 발동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노래 잘하는 가수로 손꼽히는 jk 김동욱 역시 최백호의 라이브를 듣고는 연륜의 의미를 절감했다며 자신 본연의 감성을 담아내려면 아직 멀었다고 자평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의 독선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일만 친구’로 널리 알려진 최백호(1950년생). 그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음악을 향유했다. 생활은 곧 음악으로 표출될 만큼 그의 화법과 글쓰기는 깊이가 있었다. 그가 불렀던 노래는 거의 자신이 직접 글을 썼으니 그의 노랫말을 짚어가면 그의 이력을 잘 살필 수 있다.

부산 다운타운가에서 음악활동을 했던 최백호는 1976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고 하수영에게 발탁되면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담은 첫 음반을 발표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설움이 더해요’로 시작하는 가사는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말하는 듯하지만 정작 스무살 가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뒷골목을 거닐다 쓴 눈물의 가사다.

최백호는 이듬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당시 모든 사람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통과의례처럼 불렀던 ‘입영전야’‘그쟈’가 수록된 2집 음반까지 연이어 히트를 치며 인기가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후로 ‘영일만 친구’ ‘낭만에 관하여’ 등 주옥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남녀간의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 인생을 관조하듯 깊이있는 인생관을 노래로 펼쳐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 그의 아버지는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원봉씨였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최백호는 갑작스럽게 기우는 가세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을 만큼 당당했고,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횡단보도로 아이들이 지나가는데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운전자를 보고 따라가 따끔하게 주의를 주는 사람이 바로 최백호다.

지난해 데뷔 28년을 맞아 베스트 음반을 발표한 최백호. ‘청사포’라는 곡이 중년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동안 틈틈이 시나리오를 써왔고 촘촘히 영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왔다며 내년에는 영화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지천명을 넘긴 희끗한 머리와 소박한 차림새. 특유의 희미한 미소 사이로 지그시 눈을 감고 뿜어나오는 그의 깊은 목소리는 그저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같이 부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할 뿐이다.

/연예칼럼니스트 강태규 ellong8273@naver.com

 

 

 

[강태규 그때 그사람] 김일우, 죽음 초월한 연기열정
[스포츠투데이 2004-06-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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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끝내 저버리지 않은 한 배우의 처연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배우 김일우(1953년생). 얼굴 가득 웃음과 서글픔이 동시에 교차하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무대와 스크린속에서 강렬히 뿜어낸 우리시대의 명배우였기에 지난 13일,위암으로 세상과 결별한 그의 짧은 생은 더욱 애석하다.

연극과 영화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수많은 애도의 글이 줄을 잇고 있어 그의 개성적인 정평의 연기는 더욱 빛나 보인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끼로 배우가 되겠다고 공언했던 김일우는 양정고 연극반에서 그 꿈을 다져나갔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1976년 초연된 극작가 오태석의 연극 ‘춘풍의 처’로 데뷔해 탄탄한 연기를 구축해 나가는 한편 영화 기획자로도 감각을 발휘했다.

1981년,영화기획 보조로 일하던 당시 그는 뜻밖의 기회에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그를 눈여겨 본 배우 안성기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영화 ‘어둠의 자식들’(감독 이장호)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88년 강우석 감독의 데뷔작 ‘달콤한 신부들’을 기획하면서 출연 제의를 받아 배우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후로 스크린과 무대를 오가며 그의 숨은 재능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1997년 마침내 영화 ‘학생부군신위’(감독 박철수)로 제34회 대종상영화제와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그의 연기는 절정에 올랐다.

그후로도 그는 ‘할렐루야’(1997·감독 신승수),‘투캅스3’(1998·감독 김상진),‘엽기적인 그녀’(2001·감독 곽재용) 등을 통해 영화팬들의 가슴에 빛나는 조연배우로 각인된 인생을 살다,2003년 50번째 생일날 위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의 연기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2월 개봉된 ‘목포는 항구다’(감독 김지훈)에서 형사반장역을 맡은 김일우는 항암치료로 빠지는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촬영기간 동안 모자를 눌러쓰고 출연해 후배 연기자들을 숙연케 했다.

배우 김일우의 죽음이 끝끝내 미련처럼 남는 이유는 “미국,일본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는 지금 국제화된 배우가 되기 위해 영어·일어 등을 열심히 공부한다.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금언을 늘 간직하는 연기자가 되겠다”던 신인배우 같은 각오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에 맞서 혼신의 연기로,삶을 스크린속으로 내던진 한 배우의 열정을 그 무엇으로 더 표현할까.

/연예칼럼니스트 강태규 ellong8273@naver.com

 

 

김애경의 20대 어느날
[뉴스메이커 2004-06-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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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정말 그렇군요. 세월보다 더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33년 전 사진인데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마 잘 모를 겁니다.

TV에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토크쇼에도 더러 출연합니다. 약간 비음 섞인 목소리로 수다를 떠는 편입니다. 영락없는 아줌마입니다. 이것저것 눈치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편입니다. 1970년 MBC 탤런트 공채 1기로 연기활동을 시작했죠. 다른 연예인에 비해 좀 늦은 편인데 대학졸업 후 연예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울깍두기〉 〈한지붕 세가족〉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등에서 감초역할을 했는데 출연한 연극, 영화, 드라마 편수를 다 합하면 수백은 될 겁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변강쇠〉 〈장사의 꿈〉 〈애마부인〉(82년) 등 에로물에도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육감적인 여자 주인공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는 역인데 그래도 섹시한 편이었습니다.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책도 냈습니다. 〈시고도 떫고도 더러운 사랑〉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점점 더 모르겠다고요? 자세히 보면 지금의 모습이 보일 겁니다. 아직도 당시의 고운 티가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예, 김애경입니다. 화려했던 20대의 모습입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섰기에 늙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이토록 변했습니다.


그때는 무슨일이(1973년)

이에리사-정현숙 세계여자탁구 석권

사라예보의 꿈. 그건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탁구를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던가. 선수라고 해봤자 고작 몇백 명선.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낭자'들이 세계여자탁구계를 석권한 것이었다. 4월 10일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결승에서 한국은 황금콤비 이에리사, 정현숙이 파워 넘친 플레이를 펼치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건국 이후 초유의 대사건이었다. 이 우승으로 대한민국은 한동안 탁구열풍에 휩싸였다.

 

 

[강태규 그때 그사람] 장미희
[스포츠투데이 2004-06-1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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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1992년 제30회 대종상 시상식장 내에 울려퍼진 이 수상 소감은 브라운관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날아갔다. 영화 ‘사의찬미’(감독 김호선.91년 개봉)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미희가 쏟아낸 그 닭살스러운 말은 독특한 억양에 섞여 그토록 아름답고 여성미 넘치게 들려 왔고 오늘날까지 장미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1976년 ‘성춘향전’(감독 박태원) 주연으로 캐스팅 되어 영화계에 입문한 지 17년이던 이 해에 그녀는 ‘사의찬미’로 청룡상(12회) 대종상(30회) 아태영화제(37회) 춘사영화예술상(2회) 골든스타상(2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황금촬영상(16회) 연기대상까지 독식하며 다시 한번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문희-남정임-윤정희 트로이카가 저물던 1970년대 말. 장미희-정윤희-유지인 트로이카가 호스티스 영화를 발판으로 스타덤에 오르며 세대교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미녀 삼총사 중 유독 장미희의 행보는 남달랐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정윤희와 유지인이 스크린 밖으로 서서히 멀어졌지만 장미희는 ‘사의찬미’라는 예술 영화 작품으로 제2의 영화 인생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의 뒤에는 자신과의 눈물겨운 처절한 싸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보였다.

장미희는 1977년 9월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겨울여자’(감독 김호선)에서 신성일,김추련과 함께 여대생의 성적 방황을 리얼하게 연기하며 6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퀸으로 등극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단성사 앞에서 비원 앞 물만두집까지 장장 1,000m의 장사진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고 했으니 장미희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쯤 되면,스무 살의 어린 여배우는 자신을 누르는 너무 큰 중압감에 정체성을 쉬 잃을 수 있겠건만 그녀는 배우로서 갖추어야 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미희는 왕성한 영화 활동을 하면서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에서 문화와 역사학을 전공했다. 또,미국 UCLA대학교,AFI에서 영화연출과 영화연기를,명지대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미국 Hwathorne대학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자기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언니에게 손목을 잡힌 채,한 영화사의 오디션장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녀의 끼는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긋고 말았다.

영화 열정으로 끝없이 달려온 불혹의 중반,일과 결혼했다는 그녀는 세월이 흘러도 더욱 고혹적인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여백의 참맛을 아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그녀의 말 속에서 배우로서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자기 관리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는 장미희는 오늘도 한국 영화의 불을 밝히는 천상 배우임에 틀림없다.

/연예칼럼니스트 ellong8273@naver.com

 

 

서구적 요염함 오수미
[뉴스메이커 2004-06-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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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앨범]

그녀는 늘 음침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음탕한 눈웃음은 퇴폐적이다 못해 염세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30대 후반, 흑인처럼 머리를 산더미같이 올리고 바글바글 볶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진에서 보듯 그녀의 20세는 화려했다.

눈, 코, 입이 시원시원한 서구형 미녀에서 세월을 먹을수록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요부로 변한 오수미. 그녀의 요염함은 정말 특이했다. 무료해서 미치겠다는 무표정 속에 색(色)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인이어서 그랬을까.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된 박복한 여배우. '히로뽕' 복용으로 된서리를 맞더니 2년 후인 1992년 마흔두 살의 나이에 갑작스레 지고 말았다. 그것도 머나먼 곳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이건 어쩌면 결과를 안 이후의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30대의 그녀를 봤을때 그의 운명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는 무슨일이(1970년)

YS-DJ 첫 표대결

40대기수론을 펼치며 신민당 대통령후보전에 나선 김영삼과 김대중. 최연소국회의원이며 원내총무 출신인 김영삼이 유력했지만 결과는 김대중의 역전극. 패배 속에서 성장한 김대중은 박정희와 한판대결을 벌였지만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표밭구도는 여촌야도. 중부이남은 호남이든 영남이든 박정희를 찍었고 서울 등 대도시는 야당후보인 김대중을 찍었다. 당시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교류, 4국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는데 그것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빨갱이'라는 악령도 그때 붙은 것으로 그로 인해 그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꿈을 수십 년간 묵혀야 했다.

 

[강태규 그때 그사람] 오수비, 지적관능미 넘쳤던 ‘2대 애마부인’
[스포츠투데이 2004-06-0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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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비…. 제비 같은 날렵한 몸매와 그림으로만 표현 가능할 것 같은 그 동물적인 볼륨에 대한 추억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수비는 대구의 한 변두리 동시개봉관 극장 앞에서 친구와 1시간가량 주변 정세를 살피던 나를 결국 어둠 속 스크린 앞으로 안착시켰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감독 박용준)는 초반부터 나를 제압하더니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목젖은 이미 타버릴 대로 타버렸고 나를 진공상태의 그로기로 몰고 간 장면은 바로 달빛에 물든 해운대 백사장신이었다.

뽀얀 피부와 가냘픈 목선,육중한 가슴까지 완벽한 구성요건을 갖춘 오수비. 당대 에로 여배우들에게서 느낄 수 없던 지적 관능미가 물씬 넘치는 그녀였기에 백사장신에서의 일명 ‘파도 자위’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밀려오는 파도의 속도에 맞춰 목을 젖히며 토해내는 그 저음의 탄성. 파도가 칠 때마다 모든 것을 다 받아줄 것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벌린 두 다리는 기억 속에서 끝내 잊혀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강하고도 묘한 향수로 우리를 자극해왔다.

희한하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인터넷과 도색영상물을 통해 더 자극적이고 과감한 장면들을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요즘에도 그때의 성적 포만감을 그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채울 수 없으니 분명 배우 오수비가 가지는 힘일 게다.

165㎝ 45㎏의 빼어난 몸매를 지닌 오수비는 경희대학교 출신으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예비스타로 손색이 없었다. 스물두살이던 1981년 미스코리아 서울 대표로 출전해 본선 15명의 경합자 대열에 낄 정도였다. 그 후 패션모델로 활동하면서 주목받은 그녀는 1982년 안소영이 타고 온 애마를 이듬해 몰고 오면서 2대 애마부인으로 화제를 뿌렸다.

“애마야,네 몸은 언제 봐도 예뻐. 불꽃을 숨기고 있는 몸이야.” 지금 들으면 유치한 이 영화 속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또 레즈비언 역을 맡은 중견배우 김애경과 함께 백사장을 뒹굴다가 돌연 나체로 바다에 뛰어든 오수비의 흠뻑 젖은 뒷모습은 당시 두고두고 회자된 명장면이었다.

그 후 그녀는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유혹시대’ 등 에로물 10여편에 출연한 뒤 결혼,도미했다. 중학교 때 사귀던 첫사랑과 영화처럼 결혼했지만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제 그녀의 나이 45세. 시카고에서 미용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성공적으로 일구고 있는 오수비는 그동안 미스코리아(시카고) 여러 명을 배출해내는 등 사업수완을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당시 애마부인의 젖을 만지며 자라난 사내들과 애마의 거침없는 성적 도발에 위기의식을 가진 여인들이 어느덧 불혹의 언저리에 걸려 있다. 어두운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 듯한 그 탄탄한 추억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예칼럼니스트 ellong8273@naver.com

 

 

그시절 흥행 메이커 장미희
[뉴스메이커 2004-05-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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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앨범]

1977년 영화 속 풍경.

'겨울여자' 장미희의 우수 어린 눈빛과 울음 머금은 목소리에 수백만 청춘은 넋을 놓았다. 스치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 야리야리한 그녀 앞에서 감히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남성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2004년 TV 속 풍경.

〈흥부네 박터졌네〉에서 노처녀 장미희는 할아버지급 아저씨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작업에 들어간다. 과연 그녀에게도 청순가련한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푼수연기가 자연스럽다.

27년의 세월이 공주과의 그녀를 푼수과의 아줌마로 변하게 했을 터. '무서운 건 시간밖에 없다'는 말을 입증하듯 그녀의 연기는 이제 거침없다. 가벼운 농담에도 볼을 붉히며 돌아서던 과장된 수줍음의 거울 속 그녀는 가고 없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처녀' 못잖은 '귀여운 중년'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70~80년대 흥행메이커 장미희. 〈겨울여자〉에서 그녀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애틋한 애정연기로 58만6천 명이라는 구름관중을 모았다. 공전의 히트작으로 〈겨울여자〉의 이 기록은 13년이 지난 1990년 〈장군의 아들〉에 의해 깨졌다. 


그때는 무슨 일이(1977년)

백건우 부부 파리로 탈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가 피랍 중 파리로 탈출했다.

당시 북한은 남한 사람들에 의해 '북괴'로 불린 적군이었다. 해외여행이 쉽지도 않았지만 여행 전 필수과목이 안기부에서 '북괴'에 대해 교육받는 일이었다. 여행 중 북한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라는 식이었는데 북한 사람도 그런 교육을 받았는지 남북한 사람들은 만나면 외면하기 바빴다.

백건우씨의 피랍으로 '천인공노'할 북에 대한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고 남북은 서로 무서워하며 벌벌 떨었다. 

 

 

[강태규 그때 그사람] 패티김, 국내가수 첫 카네기홀 단독콘서트
[스포츠투데이 2004-05-2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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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45년.

반세기를 한 분야에서 최고라는 명예와 평가를 받으며 산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격조 있는 무대매너와 강렬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우리 가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패티김은 그렇게 타의 모범이 되도록 자신의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1959년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악극단의 퇴조를 부추긴 미8군무대를 통해 데뷔한 패티김(본명 김혜자)은 이듬해 광복 후 일본 정부로부터 초청된 최초의 가수로 일본 진출이라는 화제를 모았다. 이어 팝의 고장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활동무대를 넓혀 미국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쟈니카슨 투나이트쇼’에 출연하는 등 공연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4년간의 미국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패티김은 1967년 TBC와 KBS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패티김쇼’를 선보임으로써 국내 개인 프로그램의 시초가 되는 이력을 새겼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만큼 그녀의 행보는 주목을 받았다. 1967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해 노래 실력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끼는 1974년 여름 개봉된 영화 ‘이별’에서 신성일과의 열연으로 이어졌다. 서울 관객 5만명이라는 흥행 성적표를 올렸으나 그녀는 가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성숙함을 보였다.

1989년 가요계에서는 놀랄 만한 경사를 맞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예술 무대만을 허락한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중가수에게 공연을 허락한 일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당시 대중가수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세종문화회관의 첫 입성 역시 패티김의 몫이었으니 가수로서의 그녀의 위상을 가늠할 만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데뷔 30주년인 1989년 패티김은 우리나라 대중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단독콘서트를 열어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함으로써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국민에게 경이로운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음악팬들에게 받은 사랑과 부와 명예를 모두 돌려주기 위해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패티김은 사회복지기금마련 공연을 수없이 펼쳐오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데뷔 45주년 공연에서 최근 가수로 데뷔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딸 카밀라와 함께 열창하는 모습은 공연장을 찾은 관객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사랑을 남기고 떠난 사람’ ‘초우’ ‘서울의 찬가’ ‘못 잊어’ 등 주옥같은 수백곡을 남긴 그녀의 나이 65세. 반백의 가수 인생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

“여가수는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잃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을 지키려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참는 자세가 요구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게 없다’는 게 내 신조다”고 말하는 그녀는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여전히 노래로 우리 가슴을 파고들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답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으리라.

/강태규 연예칼럼니스트 ellong8273@naver.com

 

 

[강태규 그때 그사람] 유재하, 음반한장으로 전설이된 천재 뮤지션
[스포츠투데이 2004-05-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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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에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가 있다면 대중음악계에는 스물 다섯해를 살다간 천재 뮤지션 유재하가 있다.

스물 다섯해,그 짧은 시간으로 인생에서 무엇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유재하가 남긴 단 한 장의 음반은 8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발라드 음악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는 위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적 업적은 오늘의 후배 뮤지션들에게 중요한 지침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음악적 역량과 감성은 앞으로도 계속 조명되어질 만큼 천재적 뮤지션이었다.

1987년 3월. ‘지난날’ ‘텅빈 오늘밤’ ‘우리들의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우울한 편지’가 수록된 유재하의 음반이 발표되었지만,그해 11월1일 새벽 교통사고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듯 끝내 가리워진 길로 떠나고 말았다.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한 유재하가 이듬해 자신의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한 음반사로 가져온 악보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완벽한 관현악보로 작사 작곡 편곡이 되어 있었고 드럼과 베이스를 제외한 나머지 연주까지 혼자 소화할 정도로 디테일했다.

대중가요란 시간이 흐르면 기억속에 묻혀지게 마련이지만 유재하가 발표한 단 한 장의 음반은 18년이 흐른 지금,수록된 전곡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큼 세련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 경이로울 따름이다.

지난해 5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제작 싸이더스)에 삽입되어 극의 결정적 단서 역할을 단단히 소화해낸 테마곡 ‘우울한 편지’는 독특한 코드 진행과 당시 가요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묘한 변조의 미학을 선보임으로써 들을수록 팬에게 충격적인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었다.

당시 금기시되었던 장조와 단조로의 변화 무상한 음악을 새련되고 편안하게 만드는 유재하 고유의 음악적 색감은 그후로 후배 뮤지션 김현철,김광진에게도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며 영향을 미친 듯하지만 분명 유재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죽음이 애석할 따름이지만 다행스럽게도 1989년도 부터 시작된 ‘유재하 음악제’는 오늘날 우리 가요계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가요계의 실력파들로 자타가 공인하는 조규찬,유희열,강현민,심현보,이한철,나원주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이 ‘유재하 음악제’가 배출한 스타 뮤지션들이니 유재하는 죽어서도 그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뮤지션은 결국 한계에 다다르게 마련이다. 유재하 음악의 저변에는 6년을 한결처럼 피끓게 했던 애인과의 만남과 아픔,그리고 다시 만남에 이르는 목숨같은 사랑들로 채워져 있다. ‘우울한 편지’ 역시 그녀에게 받은 편지 내용으로 만들어 졌다.

1987년 11월1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5개월 뒤인 88년 3월에 편지속의 주인공과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에도 영국의 엘튼존이나 미국의 밥 딜런 같은 영원한 자유인이자 아티스트가 있다고 자부했을 지도 모르겠다.

/연예칼럼니스트 강태규 ellong8273@naver.com

 

 

[추억의 스타앨범]선한 느낌 청춘스타 최선아
[뉴스메이커 2004-05-2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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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은막의 스타'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인기의 탑을 쌓았다. 그런데 같은 스타급 여배우로 그 시대엔 비슷한 인기를 누렸더라도 세월이 지난 후 잔상에선 많은 차이가 난다. 당시에도 대단했지만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관심대상인 여배우가 있는가 하면 당시엔 제법 유명했지만 불과 10여 년 후 까맣게 잊혀지는 스타도 있다.

최선아. 1980년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부지런히 누볐던 여배우이다. 귀여운 이미지를 앞세워 청소년물-청춘물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선한 느낌을 준 좋은 여배우인데 묘하게도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최선아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없다. 어떤 가수는 노래 한 곡으로 평생을 우려먹는데 그에 비하면 최선아는 생각나는 것이 너무 없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한창 땐 꽤 활약한 것만은 분명한데.... 

나이가 든 후 활동을 줄였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도 한 이유지만 그보다는 팬들의 뇌리에 강렬히 어필할 만한 작품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듯. 그저 예쁜 것만으론 불세출의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좋은 작품을 만나 인상적인 연기를 해야 아름다움도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때는 무슨 일이(1981년)

88올림픽 서울 개최 발표

'쎄울'. 서반아어의 서울 발음이다. 한동안 세울은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단어였다. 9월 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총회에서 그렇게 88년 하계올림픽 서울 개최를 발표했다. 일본과의 싸움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하면 우리도 한다는 것이 '한국민의 자존심'인데 일본은 훨씬 먼저 올림픽 유치에 나서고도 완패를 당했다. 한국은 현대 정주영 회장을 앞세워 저인망식으로 IOC 위원을 설득,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일본은 몇 년 후 그의 아들인 정몽준에게 다시 한 번 당하는데 그것이 월드컵이다.

    탁구러버 표면을 복원시켜서 회전력을 살리는 영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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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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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님의 댓글

no_profile 배움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시간 나는대로 차근 차근히 봐야 하겠습니다.</p>
<p>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저기까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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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님의 댓글

no_profile 여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흘러간 것은 전설이 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요</p>
<p>그러니 착하게 아름답게 살자~~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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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님의 댓글

no_profile 배움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오늘은 최백호까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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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탁님의 댓글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최백호 노래 참 좋습니다.</p>
<p>오늘은 노래게시판에 "낭만에 대하여"를 올리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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