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의 조선통신사는 조공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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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0%를 넘기도 했답니다.
1566∼1825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국과의 관계를 담은 문서를 엮은
통항일람(通航一覽)에 따르면
1682년 에도로 가는 중간거점인 긴키 지역에서
조선통신사 접대에 쓰인 비용이 쌀 318만7000여 석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1697년 일본의 쌀 총생산량(2580만 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해 쌀 생산량의 10%가 훌쩍 넘는 양 입니다.
또한 1655년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금 100만 냥(쌀 83만3000여 석)이 쓰였다는 언급도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 3%의 국부(國富)가 조선통신사 접대에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답니다.
이런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당시 막부정권은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마을에 특별세금을 부과하고
노역에 수만 명을 동원했다 합니다.
조선통신사가 온 1764년 20만 명 규모의 민란이 일어난 것도
특별세 추가 부담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고요.
막부정권은 문명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지속되길 원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접대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댓글목록
고고탁님의 댓글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p>조선중후기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고구마를 들여오게 됩니다.</p><p>이 고구마가 유럽에서는 남아메리카로부터 들여온 감자와 옥수수를 통해서 유럽의 기근을 막았듯,</p><p>조선 후기 기근을 막는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됩니다.</p><p>조일간의 외교를 통해서 얻은 최대의 수확이라고 볼 수 있죠.</p>
prince님의 댓글
princ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
넵, 바위님 Vegas님오랜만에 뵙고, 반갑습니다...^^</p><p><br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