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세계랭킹 1위 지킨 ‘탁구’ 덩야핑
페이지 정보
본문
키 150㎝ ‘마녀’ 별명… 우승만 132번
1987년 중국의 탁구선수권대회 우승은 13세 소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듬해 중국 탁구 국가대표팀은 선수 선발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실력대로라면 이 소녀를 뽑아야 하지만 선수로 선발하기엔 키가 너무 작았다.
격렬한 논란 끝에 150㎝도 안 되는 이 소녀는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열악한 체격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에 차고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근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 소녀가 바로 ‘마녀’로 불리며 90년대 여자 탁구계를 지배한 덩야핑이다. 덩야핑은 88년 첫 출전한 아시안컵 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89년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복식 제패를 시작으로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과 복식 2관왕 이후 국제 대회마다 밥 먹듯이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단식과 복식 2관왕 2연패를 달성했다. 선수 생활 중 그가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한 횟수만 무려 132번이다.
중국 대표팀 코치진의 우려대로 덩야핑은 키가 다 컸을 때도 150㎝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탁구대에 바짝 붙어 빠른 박자로 경기하는 그에게 적수는 없었다. 당시 그의 라켓 실력과 눈매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마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89년 처음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그는 97년 은퇴할 때까지 독보적인 정상을 지켰다. 93년 그가 몇 주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상대가 한국의 현정화였다. 사실 현정화는 덩야핑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래서 “덩야핑 때문에 탁구를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93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덩야핑이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귀화한 진중홍에게 예선에서 패하는 이변이 벌어졌고, 현정화가 결승에서 중국의 가오준을 격파하면서 잠시지만 단식 1위에 올랐었다.
덩야핑은 97년 영국 맨체스터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끝으로 은퇴했다. 24살밖에 안된 데다 기량이 여전히 뛰어난 그의 은퇴에 대해 중국 대표팀이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왕난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쨌든 선수생활을 그만둔 그는 특기자로 중국 명문 칭화대에 들어갔다. 입학할 때는 영어를 하나도 못했지만 지독한 노력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경영학으로 노팅엄대학에서 석사를,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생 시절부터 베이징 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2003년부터 올림픽 조직위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엔 선수촌 부주임 겸 대변인으로 세계 선수들을 맞이했다. 그는 최근 정치인과 경영인으로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2009년 공산주의 청년단 베이징시위원회 부서기로 정계 입문한 그는 현재 중국의 국정 자문기관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의원이며 2010년부터 인민일보 계열 검색엔진 지커닷컴 총경리(CEO)를 맡고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1987년 중국의 탁구선수권대회 우승은 13세 소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듬해 중국 탁구 국가대표팀은 선수 선발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실력대로라면 이 소녀를 뽑아야 하지만 선수로 선발하기엔 키가 너무 작았다.
격렬한 논란 끝에 150㎝도 안 되는 이 소녀는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열악한 체격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에 차고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근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 소녀가 바로 ‘마녀’로 불리며 90년대 여자 탁구계를 지배한 덩야핑이다. 덩야핑은 88년 첫 출전한 아시안컵 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89년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복식 제패를 시작으로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과 복식 2관왕 이후 국제 대회마다 밥 먹듯이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단식과 복식 2관왕 2연패를 달성했다. 선수 생활 중 그가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한 횟수만 무려 132번이다.
중국 대표팀 코치진의 우려대로 덩야핑은 키가 다 컸을 때도 150㎝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탁구대에 바짝 붙어 빠른 박자로 경기하는 그에게 적수는 없었다. 당시 그의 라켓 실력과 눈매가 어찌나 무서웠는지 ‘마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89년 처음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그는 97년 은퇴할 때까지 독보적인 정상을 지켰다. 93년 그가 몇 주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상대가 한국의 현정화였다. 사실 현정화는 덩야핑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래서 “덩야핑 때문에 탁구를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93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덩야핑이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귀화한 진중홍에게 예선에서 패하는 이변이 벌어졌고, 현정화가 결승에서 중국의 가오준을 격파하면서 잠시지만 단식 1위에 올랐었다.
덩야핑은 97년 영국 맨체스터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끝으로 은퇴했다. 24살밖에 안된 데다 기량이 여전히 뛰어난 그의 은퇴에 대해 중국 대표팀이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왕난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쨌든 선수생활을 그만둔 그는 특기자로 중국 명문 칭화대에 들어갔다. 입학할 때는 영어를 하나도 못했지만 지독한 노력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경영학으로 노팅엄대학에서 석사를,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생 시절부터 베이징 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2003년부터 올림픽 조직위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엔 선수촌 부주임 겸 대변인으로 세계 선수들을 맞이했다. 그는 최근 정치인과 경영인으로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2009년 공산주의 청년단 베이징시위원회 부서기로 정계 입문한 그는 현재 중국의 국정 자문기관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의원이며 2010년부터 인민일보 계열 검색엔진 지커닷컴 총경리(CEO)를 맡고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비추천1
댓글목록
Mumu님의 댓글
Mumu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p>예전에 시계추처럼 통통거리면서 탁구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매우 신기했답니다. 그 작은 체구로 공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서...</p>
있는그대로님의 댓글
있는그대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오! 대단합니다. </p>
<p>덩야핑보다 더한 선수가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p>
<p>저절로 감탄이 나오네요.....</p>
Vegas님의 댓글
Vega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많은 중국탁구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p>
<p>탁구를 떠나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야주고 있지요.</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