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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리사『내 인생은 單式,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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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에리사
1954년 충남 보령 출생. 서울女商·경희大·명지大 대학원 졸업(체육학 박사). 1970년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개인단식 우승, 1972년 제15회 스칸디나비아 오픈탁구대회(스웨덴) 개인전 단·복식 우승, 1973년 제32회 세계대회(사라예보) 단체전 우승, 1976년 제28회 서독 국제오픈탁구 선수권대회 개인전 단·복식 우승, 1980년 서독 FTG 프랑크푸르트 팀 코치 겸 선수, 국가대표 여자탁구팀 코치, 경희大 탁구팀 코치, 국가대표 탁구팀 감독, 국가대표 상비군 수석코치 역임. 現 용인大 사회체육학과 교수,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체육회 태릉선수촌 제17代 촌장.

 

39년 만의 첫 여성 선수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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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을 쥐어짜면 눈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오랜 세월 만남과 헤어짐의 정거장이었으니까.
 
  태릉선수촌을 쥐어짜면 어떻게 될까? 국가대표 선수들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이다. 39년간 이곳을 스쳐간 승부사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얼룩진 곳이다.
 
  이곳에 요즘 새 기운이 불고 있다. 여성촌장이 부임한 것이다.
 
  李에리사(51). 그에게는 氏(씨)나 孃(양)의 호칭보다 선수나 코치, 감독이란 호칭이 훨씬 잘 어울린다.
 
  지난 4월26일 오후 2시 그를 만나러 태릉선수촌에 갔다. 선수촌장실은 공사 중이었다. 방이 너무 커 줄인다고 했다. 10인용 응접세트는 임원실로 옮기고 가로 3m, 세로 1m가 넘는 天池(천지) 벽화도 입촌선수 현황판으로 바뀌고 있었다.
 
  ―왜 이리 뜯습니까.
 
  『방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요. 저는 권위적인 걸 참 싫어합니다. 책상 위의 저 컴퓨터도 치울 생각입니다. 촌장이 책상에 앉아 있으면 누가 선수촌을 돌아봅니까?』
 
  ―무척 바빠 보입니다.
 
  『매일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9시까지 풀 타임으로 뜁니다. 업무파악이 급하니까요. 귀로 들어서 될 일도 있지만 눈으로 확인할 부분도 많거든요. 밤늦게까지 물리치료실에 불이 켜 있으면 다친 선수가 많다는 거죠. 가봐야지요』
 
  그는 집에서 자식이 아프면 어머니가 보살피듯 이곳에서 선수들이 다치면 촌장이 챙기는 게 도리라고 했다.
 
  이날 현재 선수촌에 들어와 있는 선수·임원은 9개 종목 307명이다.
 
  그도 다음달 숙소가 마련되는 대로 이곳에서 선수들과 숙식을 함께할 작정이다.
 
  李촌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당장 내일부터 선수촌에서 먹고 자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천을 못 했다. 1966년 6월 태릉선수촌이 문을 연 뒤로 촌장은 줄곧 남자였기에 숙소 또한 남자선수 棟(동)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 촌장이 男棟(남동)을 들락거리게 되면 샤워를 마친 남자선수들이 속옷차림으로 나다니지 못하게 된다. 女棟에 숙소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성남시 분당의 집에서 출퇴근하는 수밖에.
 
  ―태릉의 터줏대감 아닌가요.
 
  『3기생입니다. 1969년 中3 때 들어왔으니까. 그땐 정말 고생했습니다』
 
  당시는 방 하나에 4명이 잤단다. 목욕탕과 화장실은 복도에 있고 세탁기도 1대뿐이었고 난방도 시원찮았다.
 
  『태릉의 겨울은 서울시내보다 기온이 2~3℃ 낮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더 추우니 짬을 내서 일부러 운동장을 뜁니다. 두툼한 파카를 입고 축구장 언덕을 몇 바퀴씩 돌다 보면 뒷머리에 고드름이 얼어붙어요. 그걸 손으로 녹여 뗐습니다. 온수 샤워는 언감생심이지요. 세탁은 손빨래였습니다』
 
  요즘은 참 편해졌다고 한다. 2인1실에 샤워실과 화장실도 갖춰져 있고 감독이 OK하면 방에서 인터넷도 할 수 있다.
 
  ―기자들이 많이 찾아오지요.
 
  『며칠 전 日本 NHK가 다녀갔어요. 기자와 카메라맨, 통역 등 3명이 왔는데 이것저것 캐묻고 사진도 많이 찍어 갔습니다』
 
 
  arrow.gif초등 3학년 때 처음 라켓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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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방송기자가 주로 뭘 물어보던가요.
 
  『「어떻게 해서 촌장이 됐느냐? 대학에선 뭘 가르쳤느냐? 언제까지 혼자 살 거냐?」 별걸 다 묻습디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지요. 선수로서 최선을 다했더니 코치·감독이 됐고,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했더니 교수·촌장이 됐다. 또 혼자 사는 까닭은 내가 본래 「單式(단식) 체질」이라서 그렇다고 했지요』
 
  맞는 말이다. 李촌장은 단식경기에 유독 강했다. 사라예보대회 단체전에서도 복식은 몇 차례 졌지만 단식은 19전19승이었다.
 
  李에리사에게 있어 탁구는 인생 그 자체다. 2.5g짜리 셀룰로이드 공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여걸이니까.
 
  ―라켓은 언제 처음 잡았습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바로 위의 오빠(李鍾來·56)가 대전중학교 탁구선수였어요. 방학 때 오빠를 따라다니며 공을 주워 주고 물 주전자도 날라 주면서 탁구를 배웠습니다』
 
  소녀는 어깨 힘이 유달리 좋았다. 오빠 친구들과 맞붙어도 파워에서 밀리지 않았다. 떡잎 좋은 나무는 올곧게 자라났고, 소문은 서울까지 퍼졌다.
 
  中1년 여름방학 때.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는 것이다. 문영여중 孫炳銖(손병수) 코치였다.
 
  李에리사의 아버지(故 李承圭·당시 서산군수)는 손님과 장시간 이야기를 했고 소녀는 다음날 가방을 챙겨 상경한다. 탁구 유학이었다. 1967년 8월15일, 열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얼마 뒤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셋째 언니(李鍾淑·62)는 에리사가 다니는 학교 옆으로 자취방을 옮겨 왔다.
 
  ―형제가 많습니까.
 
  『딸-딸-딸-아들-딸-아들-딸-아들, 이렇게 8남매입니다. 제가 일곱 번째지요. 어머니(趙春植ㆍ88)가 고생 많으셨어요』
 
  ―이름은 세례명입니까.
 
  『아버지와 언니들의 합작품이에요. 영국 女王인 엘리자베스를 떠올리면서 큰언니(李英愛·70)가 「딸부자인 우리 집에서도 여왕 한 명 나와야 한다」며 아버지를 졸랐대요. 「엘리자베스」는 너무 길고 「엘리」는 동물 이름 같아서 「에리사」로 했답니다. 본가는 경북 永川(영천)입니다』
 
  李에리사의 탁구는 中3 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해 5월 전국학생종별대회에서 개인전을 석권하더니 11월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는 실업 언니들까지 모두 꺾고 국내 頂上에 올랐다. 그때 태릉 식구가 됐다.
 
  ―중학 3학년이 실업선수들을 이길 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그땐 몰랐어요』
 
  李에리사는 이후 전국종합선수권을 7연패한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내 無敵(무적)의 여중생은 서울女商에 진학하면서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4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가 첫 무대. 주니어部 개인전 단식을 휩쓸었다.
 
 
  arrow.gif「루프 드라이브」란 魔球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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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모인 선수들이 지구촌의 내로라 하는 高手(고수)들이었다. 여고 2년생으로선 역부족이었다. 개인전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단체전에선 실업선배 鄭賢淑(정현숙)과 합세해 3위를 일궈냈다. 이듬해 11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칸디나비아오픈에서는 개인전 단·복식을 독식했다. 高3 때였다.
 
  ―중국선수들도 출전했습니까.
 
  『물론이죠. 근데 걔들이 저를 너무 몰랐던 것 같아요. 제가 나고야대회서 예선탈락했으니까』
 
  당시 탁구협회장은 국산 승용차 「새나라」를 만들던 金昌源(김창원) 신진자동차 사장이었다. 나고야의 단체전과 스톡홀름의 개인전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金회장은 응암동 신진工高 체육관을 대표선수 전용훈련장으로 내놓았다. 1년 후로 다가온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베이스캠프였다.
 
  李에리사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魔球(마구)를 개발한다. 이른바 「루프 드라이브(Loop drive)」. 공의 아랫면에 라켓을 마찰시키며 휘감아 올리는 이 타법은 스핀에 걸린 공이 공중에서 잠깐 포물선을 그리다가 역회전이 풀리는 순간 쏜살같이 상대 코트에 내리 꽂히는 변칙 타구다. 상대가 라켓을 갖다 대도 반동이 너무 커 감당이 안 된다.
 
  『배구로 치면 시간차 공격의 하나인 「B퀵」입니다. 역회전으로 인해 공이 공중에서 변속되니까 상대가 수비 타이밍을 못 잡게 되지요. 「루프 드라이브」의 핵심은 공과 라켓의 접촉에 달려 있습니다. 다리와 허리·어깨·손목이 한순간에 같이 움직여 줘야 힘이 실립니다』
 
  그는 이 魔球를 하루 700개씩 때렸단다. 한번 시작하면 45분간씩 랠리가 계속됐다. 그래도 어깨가 성한 건 부모님의 은혜였다.
 
  당시 코치를 맡았던 千榮石(천영석) 탁구협회장의 얘기다.
 
  『鄭賢淑의 수비에 朴美羅(박미라)의 전진속공, 李에리사의 루프 드라이브는 절묘한 조합이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이뤄진 거지요』
 
 
  arrow.gif처녀 生佛
 
  신진工高 체육관에서의 훈련은 엄청 고됐다. 이 대목은 단양군청 감독으로 있는 鄭賢淑씨의 회고담으로 대신한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石氷庫(석빙고) 같은 체육관에 들어갑니다. 조계사의 無盡藏(무진장) 스님이 새벽 5시부터 참선을 시작하니까요. 얼음장 같은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丹田(단전)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면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잡념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그래야 禪(선)을 깨닫는다」고 하시던 스님의 말씀이 기억 납니다』
 
  당시 석빙고의 처녀 生佛(생불)은 李에리사·鄭賢淑·朴美羅·羅仁淑(라인숙)·金順玉(김순옥)이었다.
 
  ―당시 훈련이 무척 고통스러웠겠습니다.
 
  『몸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마음도 괴로웠습니다. 한창 멋 부릴 나이인데 꼼짝도 못했으니까. 朴美羅 언니는 당시 실업선수(산업은행)였는데, 하루는 千선생님이 「머리카락이 출렁거려 스윙에 걸린다」면서 짧게 자르고 오랬어요. 朴美羅 언니는 얼씨구나 하고 서울 명동에 있는 미장원엘 갔는데 원장의 꼬드김에 넘어간 거예요. 「이렇게 예쁜 얼굴에는 파마가 최고」라는 말에, 지지고 볶은 겁니다. 돌아와서 어떻게 됐겠습니까. 「여승 無盡藏」이 됐다니까요』
 
  해가 바뀌었다. 3월 중순 선수단은 프랑스로 향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기 前 유럽탁구의 파워를 체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파리 선수촌에서의 에피소드 한 토막.
 
  『그곳 샤워실이 좀 묘하게 생겼어요. 한 가운데 담이 있고 양쪽으로 칸막이가 쳐진 하모니카 모양이었어요. 한쪽은 남자, 한쪽은 여자용인데 그날도 평소처럼 바깥에서 살펴보고 빈 자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順玉이가 야단이 난 겁니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옆 커튼 사이로 남자선수의 손이 들어오더라는 거예요. 기겁을 하고 소리를 꽥 질렀는데 더 놀란 건 비누를 빌리려던 저쪽이었어요. 順玉이가 들어간 장소가 남자 칸이었거든요』
 
  선수단은 영국 런던에 잠깐 들렀다가 개막 열흘을 앞두고 스위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지막 숨고르기를 하고 사라예보로 갈 참이었다.
 
 
  arrow.gif런던호텔에서 사라진 1만300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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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런던 공항 출국장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안관들이 한국선수단 주위를 맴돌며 외부인들과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호해 주려는 줄 알았지요. 근데 스위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상황이 영 딴판으로 바뀝디다』
 
  공항경찰은 선수들을 탈의실로 데려가 개별 몸수색을 했다. 선수들이 거칠게 항의했지만 임원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수단이 묵었던 런던호텔에서 전날 도난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선수단의 團費(단비) 1만3000달러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시간에 쫓긴 영국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이 사건을 스위스 경찰에 이첩했고 선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스위스 공항에서 도둑놈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돈은 찾았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게임에 신경 쓰기 바빠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큰 대회를 앞두고 액땜한 것이라고 여겼지요』
 
  액땜치곤 거액이었다. 이 사건은 열흘 뒤 사라예보의 영광에 묻혀 버렸다.
 
  사라예보의 4월은 꽤 추웠다. 신진工高 체육관에서의 冒寒(모한)훈련이 선수들에겐 큰 도움이 됐다.
 
  『탁구는 기온변화에 아주 민감합니다. 실내온도가 조금만 낮아지면 라켓 러버(rubber)의 탄력이 죽으니까 공에 스핀이 먹히지 않아요. 또 온도가 올라가면 탄력이 높아지면서 공이 튀는 바람에 타력조절이 어렵습니다』
 
  예선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루마니아·서독·스웨덴·프랑스·유고가 「검은 단발머리들」 앞에서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중국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arrow.gif오더 작성이 승패의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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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榮石 코치는 오더짜기에 머리를 싸맸다.
 
  여기서 잠깐, 경기방식을 알아보자. 세계선수권의 단체전은 「단-단-복-단-단」으로 치러진다. 단식 두 경기를 먼저 치르고 중간에 복식을 한 뒤 나머지 단식 두 게임으로 마무리한다. 다섯 판 가운데 세 판을 먼저 이기면 끝난다. 따라서 선수의 오더(출전순서)가 승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에 따라 對陣(대진) 파트너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 팀의 엔트리가 AB와 XY일 때 1단식은 A↔X, 2단식은 B↔Y, 3복식은 AB↔XY, 4단식은 A↔Y, 5단식은 B↔X가 맞붙도록 돼 있다. 따라서 AB팀은 승부의 분수령인 네 번째 단식에 나설 A가 主攻(주공)이고 XY팀은 연속 3게임을 치르는 Y가 에이스다.
 
  『탁구는 감독의 오더 작성이 승부의 절반이에요. 첫 카드를 잘못 내면 줄줄이 당합니다』
 
  한국은 李에리사를 A카드로 썼다. 中國은 세계랭킹 1위인 후유란(胡玉蘭)을 Y카드로 냈다.
 
  李에리사의 첫 상대는 중국의 X카드인 쳉파이잉. 쳉파이잉은 李에리사의 적수가 못 됐다. 1대 0.
 
  두 번째 게임은 鄭賢淑과 胡玉蘭. 千코치가 鄭에게 작전을 줬다. 遲攻(지공)이었다. 세이크 핸드型의 수비수인 鄭은 테이블 뒤로 썩 물러나 「세월아, 흘러라. 나는 즐긴다」면서 주걱으로 밥을 푸듯 공만 열심히 떠넘겼다. 공 쳐다보느라 목이 아파진 심판이 촉진 룰을 선언했다. 13차례 랠리 동안 승부가 나지 않으면 서브권자가 지는 것. 胡는 바빠졌고 鄭은 느긋했다. 서두르면 지는 법. 한국이 2대 0으로 앞서 나갔다.
 
  세 번째 복식에서 한국은 졌으나 주공끼리 맞붙은 네 번째 단식에서 李에리사가 胡를 2대 0 스트레이트로 쫓아버렸다. 3대 1. 게임 셋.
 
  다음날. 결선리그 첫 상대는 헝가리였다. 그런데 경기시작 시간이 됐는데도 鄭賢淑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鄭賢淑의 회고담이다.
 
  『저는 긴장하면 소변이 마려워요. 경기를 2분 앞두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안쪽 도어핸들이 떨어져 나가고 없어요. 자동으로 잠김 상태가 돼버린 거지요. 급해진 저는 「오픈 더 도어」, 「헬프 미」를 외치면서 발로 문을 막 찼지요. 한참 뒤 꼬마가 문을 열어줘서 코트로 달려갔더니 에리사가 헝가리 선수를 한창 요리하고 있데요』
 
  헝가리戰에서는 놀란 가슴의 鄭賢淑만 졌을 뿐 李에리사와 朴美羅가 3승을 합작해 3대 1로 이겼다.
 
 
  arrow.gif『너무 거시기 하지 말고, 거시기 하게 거시기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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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승전 상대는 전년도 챔피언 일본. 이 고개만 넘으면 한국탁구는 세계무대에 도전한 지 17년 만에 頂上에 오르게 된다.
 
  그날 아침 金昌源 회장이 선수들을 불렀다.
 
  『너무 거시기 하지 말고, 거시기 하게 거시기 해라』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선수들은 회장의 뜻을 눈치챘다. 얼마나 마음이 달았으면 「거시기」만 찾을까.
 
  李에리사의 첫 상대는 日本의 안경잡이 요코다(橫田)였다. 수비전형의 왼손잡이인데 李의 루프 드라이브에 쩔쩔맸다.
 
  두 번째 단식에서 鄭賢淑이 오제키(大關)에게 졌으나 복식에서 한 게임을 만회한 데 이어 李에리사가 막판에서 오제키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 무릎 꿇렸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제패였다. 임원·선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관중들은 『꼬레~ 꼬레~ 』 하며 손을 흔들어 댔다.
 
  시상대에서 세계탁구연맹(ITTF) 에반스 회장이 李에리사의 볼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선수들의 손은 가슴에 올려졌다.
 
  그런데 스피커에서는 이상하게도 애국가는 울려 나오지 않았다. 한국팀은 세계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애국가 테이프를 준비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손기정의 마라톤(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장창선의 레슬링(1966년 세계선수권)에 이은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제패 잔치는 이렇게 마감됐다.
 
  『그때 이런 우스개가 떠돌았어요. 「베트남에선 백마부대가 용맹을 떨쳤고, 사라예보에선 용마부대가 판을 쳤다」고. 千코치님과 鄭賢淑·朴美羅 언니가 龍(용)띠고 저와 金順玉이 말띠니까요』
 
  ―개인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첫판에서 탈락했습니다. 스웨덴의 라드베리란 친구였는데 어떻게 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출입구 앞 탁구대에서 경기를 했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공이 바람에 날아다니고 정신도 산만했습니다. 이겨야겠다는 욕심도 없었고요. 참 희한한 승부였습니다』
 
  李에리사는 그날의 경기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까웠다고 후회한다.
 
  『전날밤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한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고, 동행기자들의 취재에도 지쳤습니다. 자기들 마감시간만 급했지 선수의 다음날 게임 스케줄은 뒷전이었지요』
 
  그 후 ITTF의 세계 랭킹이 발표됐다. 1위는 개인전에서 우승한 후유란이고, 2위는 李에리사였다. 단체전 단식에서 거둔 19전 전승이 감안됐다.
 
 
  arrow.gif『환영식 준비 안 돼 도쿄서 이틀 묵었다』
 
  ―귀국 환영행사가 대단했지요.
 
  『유고 자그레브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10시간 이상 기내에서 시달리다 내려보니 뉴욕입디다. 비행기 값 아끼느라고 뺑뺑 돌았는지는 몰라도 선수들은 지쳐서 코피를 쏟고 기진맥진했어요. 뉴욕 대합실에서 8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비행기를 탔는데 이번에는 도쿄예요. 뒤에 안 일이지만 대한체육회에서 「아직 환영식 준비가 안 되었으니 이틀만 더 바깥에서 묵고 들어오라」고 했대요』
 
  ―사라예보의 쾌거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하던데.
 
  『선수들은 그런 걸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 우린 탁구밖에 몰랐어요』
 
  당시 조선일보 4월11일자 8면에는 「세계를 제압한 여자탁구, 얼씨구 지화자, 춤을 출까 노래를 부를까」라는 문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네 컷 만화가 야로씨는 이날 「대한체육회」 간판을 「대한여자체육회」로 바꿔 달고 있는 내용의 만평을 게재했다. 사라예보 남자탁구는 8위였다.
 
  전국 도처에 탁구장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에도 중국탁구를 계속 잡았습니까.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데요. 1년 반을 못 버텼습니다. 속공에 당하고 異質(이질) 러버에 붙잡히고…』
 
  한국여자탁구는 이듬해 9월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중국과 만났다. 頂上의 문턱에는 꼭 만리장성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번 수문장은 변칙 속공수 장리(張立)였다.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졌다.
 
  자만한 탓일까? 돌아와서 칼을 갈았다. 캘커타 세계선수권대회가 다섯 달 후로 다가오고 있었다.
 
  1975년 2월. 캘커타는 무척 더웠다. 거리에는 소가 어슬렁 대고 있고, 이마에 빨간 점을 찍은 인도 여자들은 귀고리·목걸이에다 코걸이까지 하고 다녔다. 「인도에는 소 대신 여자가 고삐를 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예선리그는 항상 그렇듯 일사천리였다. 7개국을 모두 3대 0 스트레이트로 꺾었다. 도합 21대 0.
 
 
  arrow.gif中國의 異質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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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선 1라운드 상대는 역시 중국. 두 게임씩을 서로 주고받은 뒤 파이널 게임. 李에리사의 상대는 초면의 개시내(葛新愛ㆍ훗날 介仙愛로 개명)였다.
 
  프로그램에는 스물세 살로 돼 있었으나 더 늙어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얼굴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나온 라켓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몰라도 타구가 뒤죽박죽이었다. 짧게 대면 짧게 와야 하는데 쑥 튀어나오고 엎어서 때리면 네트에 걸려야 하는데 그대로 모서리를 핥고 지나간다. 공이 라켓에 한 번 닿았다 나오면 미꾸라지처럼 살아서 꿈틀거렸다. 말로만 들어왔던 異質 러버(anti-rubber)였다.
 
  14대 21, 10대 21. 0대 2. 게임 셋.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승부였어요. 어떻게 그런 스코어가 나올 수 있나요.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체육관에서 호텔까지 울면서 걸어갔습니다』
 
  이후로 李에리사는 현관 신발장에 있는 고무깔개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려 한동안 고생했단다.
 
  사실 개시내는 사라예보의 副産物(부산물)이었다. 중국탁구가 李에리사에게 당한 직후 「루프 드라이브를 차단시킬 러버를 연구하라」는 특명이 내려졌고 그 라켓만 전공한 선수가 그녀였다.
 
  ―라켓에는 규격이 없습니까.
 
  『없어요. 공과 테이블은 규격이 있지만 라켓은 제한이 없습니다. 그걸 중국이 이용한 겁니다. 라켓은 ITTF 용구위원회의 승인만 받으면 되니까요』
 
  한국탁구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중국이 대회를 앞두고 무슨 라켓을 승인받았는지도 모른 채 1년간 죽자고 훈련만 했던 것이다. 정보의 당달봉사였다.
 
  ―이후론 중국선수를 한 번도 못 이겼습니까.
 
  『1년 뒤 서독 국제오픈대회에서 복수를 했습니다. 그땐 張立도 늙었습디다. 세대교체가 가까워 온 거지요』
 
  하노버에서 열린 이 대회는 한국 낭자들의 한풀이 마당이었다. 준결승에서 李에리사는 張立을 꺾었고 鄭賢淑은 朱祥融을 제쳤다. 결승은 李와 鄭의 「집안싸움」.
 
  鄭賢淑은 한 달 전 맹장수술을 받은 몸이었다.
 
  李에리사는 실로 오랜만에 시상대 꼭대기에 올라서며 이듬해 버밍엄 세계대회의 야무진 꿈을 꿨다.
 
 
  arrow.gif탁구 남북대결
 
  ―그 시절 탁구에서는 남북대결이 없었나요.
 
  『잘 안 만나졌어요. ITTF가 남북 간의 분위기를 감안해 組 편성에 신경을 많이 썼지요. 그런데 엉뚱하게 버밍엄에서 맞부닥뜨렸어요』
 
  1977년 3월30일 영국 버밍엄 국제전시관, 南과 北은 단체전 준결승에서 만났다. 스탠드에는 현지 교포와 유학생 2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金日成 배지를 단 北의 임원들은 카메라로 남쪽 선수 얼굴만 열심히 찍어 댔다. 영국의 BBC TV가 남북대결을 유럽 전역에 생중계했다.
 
  北에선 박영순과 박영옥이 나왔고, 南에선 李에리사와 鄭賢淑이 나섰다. 박영순은 2년 전 캘커타 대회에서 개인전을 제패한 주인공. 당시는 김영순이었는데 그동안 姓이 朴씨로 달라져 있었다.
 
  초반 두 단식은 서로 한 판씩 주고받았다. 승부의 분수령인 복식에서는 南이 이겼다. 네 번째 단식에서 鄭賢淑이 北의 에이스 박영순을 상대했다. 박영순의 스매싱은 따발총이었지만 鄭의 리시브는 「세월아 네월아」였다.
 
  「재주 좋은 것보다는 재수 좋은 게 훨씬 편하다」는 말이 있다. 朴의 실수가 잦아졌다. 게임 스코어 3대 1. 南의 승리였다.
 
  그때 국내 신문들의 기사제목은 「한국탁구, 北傀(북괴) 제압!」이었다. 崔元碩(최원석) 선수단장과 朴聖仁(박성인) 감독이 털어놓은 우승소감도 재미있다.
 
  『북괴에 지면 코트에서 쓰러지겠다는 일념으로 싸웠습니다』(崔元碩 선수단장).
 
  『국력의 대결장인 만큼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버티었습니다』(朴聖仁 감독)』
 
 
  arrow.gif중국의 新무기 스카이 서비스 등장
 
  결승전에는 또 中國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리장성 위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선수는 신인 張德英(23)이었다. 李에리사는 긴장됐다. 저 애가 또 무슨 新무기를 갖고 나왔을까?
 
  몸짓부터가 희한했다. 공을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가 내려오는 순간 손목을 돌리는데 공의 방향을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이름하여 「스카이 서비스」.
 
  李에리사와 鄭賢淑은 하늘만 쳐다보다 물러났다. 0대 3 완패였다.
 
  귀국 비행기에서 李에리사는 결심을 한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물러날 때다』
 
  은퇴의사를 탁구협회에 전했다. 태극마크를 단 지 8년 만이었다.
 
  ―협회서 은퇴식도 안 해줬나요.
 
  『은퇴식은커녕 석 달 뒤 다시 불려 나갔습니다. 崔元碩 회장님이 「평양세계선수권(1979년 4월)이 곧 닥쳐오는데 국가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해라」고 부탁합디다.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평양도 한번 가보고 싶고…』
 
  그러나 평양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대회 개막을 한 달 앞두고 선수단은 스위스로 들어가 그곳에서 전지훈련을 하면서 국제적십자를 통해 北에 비자신청을 했다. 北韓은 묵묵부답.
 
  귀국한 李에리사는 태릉선수촌에서 짐을 쌌다. 선수생활 15년, 태극마크 10년의 갈무리치곤 너무 어이없었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면 시집갈 땐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일은 동시에 못 하는 성격이에요. 탁구와 결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탁구를 도저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접기로 했지요』
 
  그는 지도자로의 변신을 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FTG 1847 클럽」에 플레잉 코치로 나갔다. 분데스리가에서 2년 반 동안 활약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2부 리그에 있던 소속클럽을 1부 2위까지 끌어올렸다.
 
  이즈음 조국은 난리였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유치해 놓고 모든 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맞췄다. 가히 「스포츠 狂國(광국)」이었다.
 
  1982년 11월 귀국한 그는 동아건설 탁구팀에 잠깐 머물다가 다시 대표팀을 맡게 된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리는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지휘봉을 잡은 것. 南과 北이 출전하는 이 대회에선 「이기면 忠臣이고 지면 逆賊」이 된다.
 
  南쪽 선수는 梁英子(양영자)와 尹璟美(윤경미), 北쪽 선수는 이분희와 조정희였다. 그런데 南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 梁은 간염이고 尹은 빈혈이었다. 결과는 2대 3 역전패. 언론들의 질타는 매섭고 아팠다.
 
  「지도능력도 문제지만 결혼 안 한 노처녀의 히스테리 때문에 선수들이 맥을 못 췄다」
 
 
  arrow.gif지도자의 길로
 
  李에리사는 두말없이 벤치를 떠났다. 그리곤 한동안 방황했다. 그때 경희大에서 불렀다. 당시 대학탁구연맹을 맡고 있던 조정훈 기획조정실장(現 태권도연맹총재)이 『대학으로 와서 공부도 할 겸 후배선수들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해 온 것. 「不敢請 固所願(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이참에 공부나 열심히 하자. 대학교수로서의 돌쌓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울올림픽 때는 코치를 안 맡았습니까.
 
  『梁英子와 玄靜和의 복식 금메달을 일궈 냈지요. 선수들이 너무 고맙습니다. 금메달은 그들이 땄지만 덕분에 제가 회생했으니까요』
 
  李코치의 지도방법은 남다르다. 기량보다도 서로의 화합에 더 무게를 둔다. 同寢(동침)·同苦(동고)·同樂(동락)하며 화장실이나 목욕탕에도 同行(동행)하게 한다. 梁英子와 玄靜和의 환상적인 커플은 그런 신뢰감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때의 숨겨진 이야기.
 
  『올림픽을 한 달 앞둔 여름, 선수들이 경기도 기흥에 있는 탁구 전용 체육관에서 합숙훈련을 할 때였습니다. 주위가 숲이라 불만 끄면 칠흑이에요. 하루는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바깥에서 「자각자각」 하는 소리가 났어요. 당시 여자선수들은 2층에 독방들을 사용했는데 더워서 문을 열고 잤습니다. 내 방이 맨 왼쪽이고 다음이 梁英子, 玄靜和, 洪次玉의 방이었지요. 처음엔 「누가 살구 따러 왔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소리가 달라요. 불을 끄고 누웠는데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요. 살그머니 일어나 닫혀 있는 커튼의 끝자락을 살짝 들춰 보니 허연 남자 손이 창틀에 붙어 있어요. 아래 층 창틀을 밟고 선수들 방으로 옮겨 가는 중이었습니다. 숨이 막힙디다. 잠깐 생각을 가다듬어 몸체가 창문을 지나갈 때 커튼을 확 열어 젖혔습니다. 사내의 눈과 제 눈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지요. 사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그대로 「쿵―」하고 떨어집디다.
 
  나는 아래층을 향해 고함을 질렀고 남자코치 선생님들이 방망이를 들고 뛰어나갔지만 사내는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장면은 소름이 끼칩니다. 그놈이 여자선수 방으로 건너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후 경보장치를 달았단다. 그런데 이 장치가 빗줄기만 지나가도 울고, 나방이 날아가도 울어 댔다. 도저히 불안해서 서울大 근처의 여관으로 옮겨 20일간 마지막 훈련을 했단다.
 
  『제가 동침을 강조하는 이유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梁英子-玄靜和는 李코치의 철저한 관리 속에서 복식 금메달을 엮어 냈다.
 
 
  arrow.gif『썰렁하다고 느꼈으면 벌써 시집갔죠』
 
  ―대학교수는 언제 됐습니까.
 
  『경희大를 졸업한 뒤 명지大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논문은 「생활체육 활동과 직장인의 여가만족 및 생활만족과의 관계」였는데 용인大의 김정행 총장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2000년 3월 처음으로 강단에 섰습니다』
 
  학과목은 「스포츠 카운슬링과 코치 이론」, 실기는 탁구다.
 
  인터뷰가 꽤 길어졌다. 그동안 비서실에서 몇 차례 메모가 날아들었고, 휴대폰도 쉴 새 없이 울렸다. 일어설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휴대폰이 울렸다. 탁구협회란다. 궁금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작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나온 포상금 1000만원을 탁구 꿈나무 육성에 써달라고 초등연맹에 기부했더니 협회서 연말 세금 정산용 영수증을 만들어서 보내겠다는군요』
 
  ―선수촌에서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집에 돌아가면 썰렁하겠습니다.
 
  『썰렁하다고 느꼈으면 벌써 시집갔겠죠?』● 

[출처] 사라예보 신화 이에리사가 털어놓은 2.5g에 숨은 이야기

    탁구러버 표면을 복원시켜서 회전력을 살리는 영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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