붐비는 탁구장, 그들이 라켓을 잡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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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서울 시내에 사설 탁구장이 늘고 있다. 올림픽 이외의 무대에서 눈에 띄게 관심을 받는 스포츠도 아니고, 김연아처럼 유명한 선수가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도 아니다.
탁구장 홍보 사이트인 구장닷컴측의 자체 분석에 의하면 지난 달 서울시에서 새로 개장한 탁구장은 약 10여 개. 매달 꼬박꼬박 10여 개의 탁구장이 생긴 지도 몇 달이 되어간다는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가봤다. 요즘 탁구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탁구, 중년을 위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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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저녁 8시. 서울시 장안2동의 한 탁구장에서는 늦은 시간에도 10명이 넘는 회원들이 탁구로 땀을 흘리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요즘 웰빙 열풍으로 헬스장을 채우고 있는 '젊은'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보이는 연령대. 그러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긴장감과 운동신경만큼은 결코 그들 못지 않아보인다.
군대에서 운동이라고는 탁구밖에 안했던 기자가 보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실력들. 쉬는 시간을 기다려 다섯 명의 탁구장 회원들과 즉석 대담을 나눠보았다. 잘 치는 20대 군인 '뺨치는' 경기력을 가진 다섯 명의 평균 연령은 52.6세다.
우선 '어떻게 탁구를 시작하게 됐는지' 물었다.
"우리 나이에 할 수 있는 게 뭐 그리 많나. 안 그래요 여보."(박행자, 55)
"나는 헬스나 골프 같은 것도 해봤어요. 근데 골프는 비용이 많이 들어. 또 러닝머신 이런 건 지겹고, 또 나이가 많잖아. 벤치프레스는 벅차고 그렇다고. 근데 탁구는 힘이 안 드는데 운동량도 적당해요. 한 2시간 치고 나면 몸이 가뿐해지더라고. 또 아내랑 같이 하니까 더 좋지."(채명효, 57)
3개월 전에 함께 탁구를 시작한 박씨와 채씨는 이 탁구장의 부부회원. 회원 중 40대 이상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서 두 사람 말고도 부부회원들이 많다고 한다. 설성경(52)씨도 2년 전부터 아내와 함께 탁구를 치고 있는 부부회원이다.
"아내가 동사무소에서 탁구를 배워오더니 저를 가르쳐줬죠. 일단 즐거운 건 기본이고요. 제가 6년 전에 건강을 잃어서 산에도 가고 중랑천 산책도 했었는데 건강 회복하려고 해 본 운동 중에는 탁구가 제일 낫더군요."
설씨의 지병은 고혈압. 한때 혈압이 240까지 나와서 쓰러질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탁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혈압 걱정은 없어지고 아내와의 승부에 더 신경을 쓰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탁구하면 달라지는 것'으로 옮겨왔다.
"여자들은 이게 실내 운동이라서 얼굴 탈 염려도 없고 관절에 무리도 안 가고 해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남자들도 탁구 치면 다들 얼굴이 하얗게 되더라고 신기하게."(김현숙, 50)
중년 남자들은 담배를 많이 접해서 니코틴 침착으로 피부가 검게 변하는데 하루 1시간 이상 탁구 치는 사람들은 점점 얼굴색이 살색으로 변하더라는 김씨의 '목격담'이다. 기자가 의학적 근거를 조심스럽게 묻자 다른 회원들도 "나도 봤다", "진짜 그러더라"며 김씨의 의견을 거든다. 결국 손용철(49)씨가 "허허. 탁구가 완전히 '뽀샵'을 해버리는구만"이라며 웃으며 못을 박는다.
"아무래도 운동을 하면 얼굴이 좋아지잖아요. 탁구가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운동량이 많아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살 빼는 데도 좋지요."
탁구장 관장이기도 한 손씨의 증언에 따르면 몸무게가 90kg이었던 한 40대 회원은 탁구를 시작하고 나서 75kg까지 무리 없이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고 한다.
경제 한파가 가져온 탁구장 창업, '전화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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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가 운영하는 이 탁구장의 고정 회원은 모두 70여 명. 회원은 40대, 30대, 50대 순이다. 70대 회원도 4명이 있는 반면, 20대 회원의 수는 60대보다도 적다고 한다. 막상 '몸짱 열풍'에 가장 민감하고 운동능력이 가장 뛰어난 20대는 탁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셈이다. 그럼 도대체 요즘 탁구장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동사무소 같은 데서 탁구를 가르쳐 주니까 탁구 생활체육 인구가 늘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요즘 탁구장 많아지는 건 아무래도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죠."
경제가 좋지 않다보니 자영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초기 자본이 적게 드는 탁구장을 선택한다는 얘기다. 손씨의 동네만 해도 벌써 소규모 탁구장이 3개나 생겼다. "사설 탁구장이 곳곳에 생기다보니 '탁구의 메카' 역할을 하던 동사무소에서도 자연스럽게 탁구를 접는 분위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경제 한파가 도리어 탁구계에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지난 3월 '영국 의학저널'에 발표된 스웨덴 웁살라대 의대 칼 미카엘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50세 때 운동을 시작한 남성은 수명을 2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 하는 운동은 담배를 끊는 것 못지않은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지속적인 건강관리가 필요한 중년이라면, 중년이 아니더라도 부쩍 예전 같지 않은 몸 때문에 불안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오늘이라도 동네 탁구장에 가서 라켓을 잡아보는 건 어떨까.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근육의 긴장감이 당신을 더욱 젊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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