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요한 슈트라우스 -- 댜뉴브강

페이지 정보

본문

 아랫곡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알려져있습니다.

슈트라우스 대표작은 아니지만 친숙한 노래라서 올립니다.

 

Strauss Danubio Blu
default.jpg

 

초기생애와 작품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프렌치호른 연주자였으며, 어머니 요제피네 프쇼르는 뮌헨에서 성공한 양조업자의 딸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고 6세에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으며 그의 첫 곡인 크리스마스 노래를 작곡했다. 11세에는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숙되지 않은 작품들이 칭찬 속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빠르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나왔다. 당연히 노력과 정신집중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음악적 소양 개발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은 사치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것 없이 살았다. 그의 가족들은 연주와 교습, 그리고 뮌헨의 준직업적 오케스트라인 '빌데 궁글'의 지휘를 통해 벌어들이는 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했다. 슈트라우스는 아버지가 지휘하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몇 년간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이를 통해 관현악 연습 및 연주에 관한 경험을 얻었다. 1882년 그는 철학과 미학, 예술사 과정을 시작했고, 이들 과목에 관한 개인적인 연구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 계속되었다.
뛰어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와의 만남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인 〈13대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13 Winds〉 작품번호 4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지휘였으며 리허설도 없었다. 그결과 1885년 10월 뷜로의 조수로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로 갔고, 1개월 후 뷜로우가 그곳을 떠남에 따라 그는 그 오케스트라를 전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불과 6개월을 머물렀지만 그당시 오케스트라의 기본 레퍼토리를 재빨리 습득했다. 보다 중요한 직책을 원했던 슈트라우스는 뮌헨 오케스트라의 제3지휘자로 갔다. 슈트라우스에게 음악적으로 길잡이가 된 작곡가는 리하르트 바그너(초기 작품)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에 대한 그의 이해를 막았지만 철학자인 친구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아버지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 1887년 뮌헨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자신의 생생한 인상을 기초로 작곡한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 Aus Italien〉 작품 16을 지휘했다. 이 작품은 많은 관중의 야유를 받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1889년 여름에 그는 바이마르로 옮겼는데, 이는 뮌헨의 분위기가 점점 부담으로 느껴졌고 그의 상급자가 그를 질시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로부터〉의 형편없는 평판은 11월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있었던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의 연주가 청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극복되었다. 이것은 슈트라우스의 작품활동에 있어 성공의 시작이었다. 바그너의 부인이었고 1883년 바그너가 죽은 이래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관리했던 코지마 바그너는 슈트라우스에게 자신을 도와 일해줄 것과 자신의 사위가 되어줄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미 1887년에 처음 만났던 프로이센 장군의 딸 파울리네 데 아나에게 구혼중에 있었다.
완숙기의 삶과 작품
1890년에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갔다. 1891~92년 과로로 2번이나 심하게 앓았던 그는 병세 회복을 위해 지중해로 갔으며 그곳에서 그리스에 대한 강한 정신적·영적 유대감을 발견했다. 1892년 크리스마스 때 이집트에서 전적으로 바그너적인 첫번째 오페라 〈군트람 Guntram〉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그가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와의 약혼을 발표했던 1894년 5월 바이마르에서 공연되었고, 두 사람은 4개월 후에 결혼했다. 10월에 그는 뮌헨의 궁정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4년 동안 살았다.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도 직책을 얻었으며 이로써 그는 30세에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뮌헨으로 이사하자마자 파울리네는 남편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항상 작곡에 먼저 시간을 할애하도록 하고 다른 일로 창작작업이 방해받지 않도록 했다. 비록 그녀의 비정상적이고 전횡적인 행동이 많은 비판과 일화를 만들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그가 나태해질 때면 그녀의 재촉이 뒤따랐는데, 그러한 재촉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은 그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슈트라우스가 결혼선물로 파울리네에게 바친 연가곡 〈4개의 노래 Vier Lieder〉 작품 27은 둘 사이의 정신적 사랑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둘 사이에는 1897년에 태어난 아들 프란츠 알렉산더가 있었다.
다음 13년 동안 슈트라우스는 잦은 순회연주 지휘로 그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주로 유럽을 여행했지만 러시아도 찾았으며, 190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이전에 작곡했던 교향시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와 같이 자전적인 성격을 가진 〈Sinfonia Domestica〉를 초연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7곡의 교향시와 85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가곡을 통해 그는 음악과 가사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그의 그러한 능력은 양식과 효과면에서 〈군트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의 2번째 오페라 〈화재 Feuersnot〉(1901, 드레스덴)에 잘 나타나 있다. 슈트라우스는 190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상당한 기쁨과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다. 같은 해 독일 작곡가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너무 헌신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나머지 그는 음악 출판업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두 오페라 〈살로메〉·〈엘렉트라〉로 유럽의 가장 진보적인 작곡가로서 인식되었다. 〈살로메〉의 첫해 공연으로 받은 저작권 사용료로 가르미슈에 이상적인 저택을 지었는데 그곳은 그가 50세 되던 해부터 살기를 원했던 곳이었다. 1908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엘렉트라〉는 당시 재능과 흥미 면에서 오스트리아 최고의 시인이었던 휴고 폰 호프만스탈의 대본을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의 합작으로 만든 2번째 작품 〈장미의 기사〉의 성공으로 두 사람 모두 큰 돈을 벌었으며 슈트라우스는 그 돈을 영국에 투자했다. 바이에른 지방 사람이었던 슈트라우스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음악(특정 관습이나 사고에 지배되지 않는)을 쓰려고 했지만, 호프만스탈은 대중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귀족적인 사람이었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1912)부터 계속된 호프만스탈의 철학적 상징주의는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슈트라우스가 만약 대본의 방향을 통제하고 오페라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 좀더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더라면, 〈엘렉트라〉에서 잠깐씩 시도했던 무조성적 경향에서 더 나아가 보다 진전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엘렉트라〉 이후 슈트라우스는 더이상 무조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렸다. 〈요제프의 전설 Josephslegende〉은 러시아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슈트라우스에게 음악을 위촉한 1시간짜리 발레였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에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뛰어난 음악적 기교로만 그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1914년 여름에 파리와 런던에서 이 발레를 지휘했고 그 직후 영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에서의 그의 재산이 압류되어 50세에 은퇴하려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재정적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지휘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슈트라우스는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정치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 선전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거절했으며(황제를 위해 곡을 작곡한 적은 있음), 모든 복잡한 일들로 인해 공연히 호프만스탈과 합작할 다음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의 작업만 늦추어지는 데 대해 분개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이외에도 3가지 작업을 추진했다. 먼저 규모가 크고 묘사적 성격이 강한 교향시인 〈알프스 교향곡 Eine Alpensinfonie〉(1911~15) 작품 64를 작곡했고 호프만스탈과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먼 장래를 염두에 둔 사업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협회를 창설했으며 호프만스탈이 번역·각색한 원래의 대본과는 상관 없이 몰리에르의 〈서민 귀족 Le Bourgesis Gentilhomme〉을 새롭게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로 재탄생시켰다. 이로써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는데, 호프만스탈은 슈트라우스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보인 반면 슈트라우스는 친절과 관용으로 그를 대했다. 1918년 휴전 이후 슈트라우스는 잠시 국립 오페라단을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초빙되었고 그후 빈으로 가서 그곳 오페라단의 공동 감독(프란츠 샬크와 함께)이 되었다. 〈그림자 없는 여인〉은 빈곤에 허덕이는 1919년의 빈 청중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
만년의 인생과 작품

슈트라우스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
그후 20년이 지나면서 작곡가로서의 슈트라우스의 명성은 그의 건강과 더불어 쇠퇴했다. 〈살로메〉·〈엘렉트라〉·〈장미의 기사〉는 그에게 예술적·재정적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오랫동안 유럽의 대표적인 작곡가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지휘자로서는 여전히 성공적이었다. 1920년대말에는 비록 오케스트라에 대한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지휘 활동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는 앞으로 돌출한 넓은 이마와 연푸른 눈을 가진 키 큰 사내였으며, 언뜻 보기에는 냉담한 태도를 가진 것 같았으나 본성은 진실되고 자상했다. 〈인테르메초 Intermezzo〉(1924)를 제외한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오페라들은 그 이전 작품들에서와 같은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인테르메초〉는 슈트라우스의 눈에 비친 자신과 파울리네의 모습을 자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영웅의 생애〉나 〈Sinfonia Domestica〉의 아이디어를 확대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새로운 종류의 말하는 듯한 노래, 정확히 계산된 관현악적 짜임새와 성악의 균형이 함께 시도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악보에 삽입된 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 자신의 대본에 의한 것이지만 〈이집트의 헬렌 Die ägyptische Helena〉(1928)·〈아라벨라 Arabella〉(1933)에서는 다시 호프만스탈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 오페라 작업으로 둘 사이의 우정을 회복시켜주었지만 불행하게도 호프만스탈은 〈아라벨라〉의 대본을 완성하고는 갑자기 죽었다. 비록 그때문에 슈트라우스가 보다 적절한 대본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며, 특히 의미심장한 사실은 1928년 이후에 작곡된 그의 모든 오페라는 호프만스탈이 고안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932년 또다른 오스트리아의 시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슈트라우스의 대본 작가가 되었으며 〈말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1935)에서의 합작은 잘 진행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가 나치를 인정하지 않고서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될 바그너의 〈파르치팔 Parzifal〉 공연 지휘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슈트라우스는 토스카니니 대신 지휘를 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로부터 배척당했던 브루노 발터 대신 베를린 연주회를 맡았는데 그때 보수로 받은 돈은 고아 기금에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예술사업을 보존하기 위한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시각은 달랐다. 11월에 그는 제3제국 국가음악국(國家音樂局)의 총재가 되었는데 그는 단지 이 자리가 음악가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라는 생각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슈트라우스에게는 재능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2가지 종류 인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1935년 드레스덴에서의 오페라 제작에 관해 유대인이었던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이 편지로 슈트라우스와 나치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 편지는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가로채였고, 츠바이크와의 작업은 금지되었으며 더욱이 〈말없는 여인〉의 공연도 금지되었다. 독일 전역과 잘츠부르크에서의 지휘활동 또한 금지되었고, 1년 동안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츠바이크는 남아메리카로 탈출했고 이 사건으로 슈트라우스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시 대본작가가 없는 상황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며느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새삼 압력의 요소가 되었다. 그는 공직에서의 사임을 강요받았지만, 1936년 7월에 있었던 베를린 올림픽 경기의 개막식을 위해 그가 작곡한 〈올림픽 찬가 Olympische Hymne〉는 그 자신이 지휘하도록 허락받았다. 11월에 그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런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금메달을 받았다.
앞선 몇 년 동안에 걸쳐 뮌헨은 그의 오페라를 많이 공연했던 대표적인 곳이었으며 다시 단막 오페라 〈평화의 날 Friedenstag〉(1938)·〈다프네 Daphne〉(1938)가 그곳에서 공연되었다. 두 작품의 대본은 슈트라우스가 당시에 만났던 뛰어난 대본작가 요제프 그레고르가 썼다. 나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 있었던 슈트라우스의 75세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는 순조롭게 치러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재산을 앗아갔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존경의 상실과 가족에 대한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의 지방관리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부득이한 신병치료를 위해 스위스로 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슈트라우스는 4년 동안을 가르미슈의 별장과 빈의 집 사이를 왕복하면서 보냈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4개 도시(베를린·뮌헨·드레스덴·빈)의 오페라 극장이 파괴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슈트라우스는 1942~48년 다수의 작품을 썼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이전의 힘과 감미로움을 되찾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위스로 가서 부인과 함께 무일푼으로 4년을 머물면서 나치 전범 재판에 출석하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의 무죄는 입증되었고 런던으로 초청되어 1947년 1개월 동안 열렸던 슈트라우스 음악제를 지휘했다. 스위스로 갈 무렵 병을 얻은 그는 수술을 받고 회복했으나 1949년 5월 독일로 돌아온 뒤 그해 가을에 바이에른 자택에서 죽었다. 그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은 애절한 회상을 담은 〈4개의 마지막 노래 Vier letzte Lieder〉(1948)였다. 19세기의 마지막 낭만주의 작곡가였던 그는 관현악법의 대가로 뛰어난 작곡가이자 훌륭한 지휘자였으며 독일의 공직자라기보다는 바이에른의 토양에 뿌리를 박았던 진정한 애국자였다.
평가
초기의 교향시와 오페라 〈살로메〉·〈엘렉트라〉에서 전통을 타파한 전위적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슈트라우스는 후기에는 그의 주변에서 진행되었던 진보와 실험에 초연한 채 보수적인 경향으로 돌아섰으며 말년에 그의 양식은 모차르트식의 보다 고전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사실 오페라 〈카프리치오 Capriccio〉(1942)와 23개의 독주 현악기를 위한 〈변용 Metamorphosen〉(1944~45), 〈4개의 마지막 노래〉는 독일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간의 기법적인 완전한 융합을 성취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은 세월이 지나면서 널리 퍼졌으며, 그의 음악은 열렬한 지지나 혐오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탁구러버 표면을 복원시켜서 회전력을 살리는 영양제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profile_image

설봉산님의 댓글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p>오랜만에 명곡을 감상했습니다..</p>

Total 1,557건 29 페이지
  • RSS
음악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비추천 날짜
157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42 0 0 08-30
156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59 0 0 08-29
155 no_profile 함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31 0 0 08-28
154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12 0 0 08-27
153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39 0 0 08-27
152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43 0 0 08-27
151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15 0 0 08-27
150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67 0 0 08-26
149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46 0 0 08-26
148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40 0 0 08-25
147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36 1 0 08-25
146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24 0 0 08-25
145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52 0 0 08-24
144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17 0 0 08-24
143 no_profile 맑음아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99 0 0 08-24
142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58 0 0 08-24
141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83 0 0 08-24
140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42 0 0 08-23
139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09 0 0 08-23
138 no_profile 짜이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33 0 0 08-22
137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39 0 0 08-22
136 no_profile 초심유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33 0 0 08-22
135 no_profile 파워컷드라이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01 0 0 08-22
134 no_profile 유진lov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92 0 0 08-22
133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34 0 0 08-22
132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69 0 0 08-22
131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61 0 0 08-22
130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50 0 0 08-22
129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88 0 0 08-22
128 no_profile 고고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78 0 0 08-22
127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721 0 0 08-21
열람중 no_profile 함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17 0 0 08-21
125 no_profile akelo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99 0 0 08-21
124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40 0 0 08-21
123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92 0 0 08-20
122 no_profile 큰발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75 0 0 08-20
121 no_profile 행복한겨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73 0 0 08-20
120
내일 댓글2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12 0 0 08-20
119
Feelings 댓글2
no_profile 초심유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29 0 0 08-20
118 no_profile 함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12 0 0 08-20
117 no_profile 설봉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99 0 0 08-20
116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47 0 0 08-20
115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14 0 0 08-20
114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80 0 0 08-20
113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17 0 0 08-20
112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918 0 0 08-20
111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66 0 0 08-20
110
내가 만일 댓글3
no_profile ahrd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15 0 0 08-19
109 no_profile 똘똘이스머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26 0 0 08-19
108 no_profile 상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19 0 0 08-17

검색